“빨간 속옷 입었잖아” 성폭행범에 무죄 선고한 페루 법원

입력 2020-11-05 10:37
'강간범의 나라 페루'라고 적힌 시위대 펫말. 인스타그램 @ica.feminista

페루 법원이 피해자의 속옷 색깔을 문제 삼아 성폭행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해 논란이다.

3일(현지시간) 남미 매체 엘 티엠포는 페루의 한 재판부가 지난달 29일 열린 성폭행 재판에서 피해 여성이 빨간 레이스 속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전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20살의 피해 여성은 미겔 에스피노사 라모스(22)라는 이름의 남성과 한 파티에서 만났고, 밤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 끝에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었다. 피해 여성은 다음날 미겔의 침대에서 벌거벗은 채 깨어났다.

피해 여성은 성폭행 혐의로 미겔을 고소했고, 검찰은 미겔의 혐의를 인정해 기소했다. 그러나 미겔은 피해 여성이 자신에게 보복하기 위해 누명을 씌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사건 당일 피해 여성이 ‘빨간 레이스 팬티’를 입고 있었다며 “강제로 성관계가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 성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빨간 팬티는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최고의 속옷”이라는 피고 측 주장을 받아들여 성관계에 강제성이 없었다고 판단했다.

피해 여성의 정신 상담을 도운 심리학자가 “피해 여성이 단호한 성격이 아니라 성관계를 강력히 거부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과감하게 자극적인 빨간 속옷을 입는 여자에게 해당하지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도리어 피해 여성의 어머니에게 책임을 물었다. 한밤중까지 딸이 귀가하지 않았으면 부모가 찾아 나서야 했다며 “자식을 돌봐야 하는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수도 리마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여성들. 인스타그램 @ica.feminista

재판부의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에 격분한 페루의 여성단체는 수도 리마에서 항의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는 피해 여성과 연대한다는 의미로 붉은 속옷을 입고, 여성주의 운동을 상징하는 노래를 불렀다. 이들은 ‘강간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 속옷을 쓰지 말라’ ‘속옷은 속옷일 뿐.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등의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시위대는 플래카드에 판결을 내린 판사 3명의 얼굴을 넣고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은 피해자를 두 번 죽인 것”이라며 이들의 파면을 요구했다.

페루 검찰은 재판부의 무죄 결정이 있었던 다음날인 지난달 30일 성명을 발표해 “재판은 무효다. 증거에 대한 더 나은 조사와 합당한 판결이 필요하다”며 새로운 재판이 다른 법정에서 열리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수련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