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 ‘100분 리사이틀’로 1000명의 가슴을 울리다

입력 2020-11-04 18:53 수정 2020-11-04 18:58
4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연주를 펼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공연 시작을 1시간 앞둔 오후 2시쯤부터 관람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1층 로비에 마련된 친필사인 앨범 판매 부스에는 100여명가량 줄이 늘어섰고 공연 플래카드 앞은 이날을 추억하려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로 붐볐다. 콘서트홀(2500석)은 객석 거리두기로 한 좌석씩을 빼고 빽빽이 들어찼다. 검은색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그가 피아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오자 객석에서는 커다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이 애타게 그렸던 이 주인공은 피아니스트 조성진. 2015년 한국인 최초 쇼팽 콩쿠르 우승을 거머쥐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유수의 교향악단과 협연한 그의 전국 6개 도시 리사이틀은 예매 시작과 동시에 매진됐다. 특히 이번 공연은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2018년 1월 이후 2년9개월 만에 가지는 투어여서 큰 관심이 쏠렸다.

이날 공연은 방역에 공들여 진행됐다. 콘서트홀 내부에서 관객은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고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전자 명부 작성이 필요했다. 손 소독제 역시 곳곳에 배치됐다. 공연 관계자들은 신속하고 안전한 출입을 위해 로비를 돌아다니며 전자명부 작성을 사전 안내하기도 했다.

관객 표정에서는 공연을 향한 기대감이 연신 묻어났다. 젊은 여성 관객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었는데 사이로는 10대부터 중·장년층 팬들도 보였다. 부모님과 함께 공연을 보러 왔다는 학생 이예준(15)군은 “조성진이라는 피아니스트를 쇼팽 콩쿠르 때부터 알게 됐다”며 “피아노를 취미로 치는데 기대한 만큼 즐거운 공연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직장인 조은주(27)씨는 “전쟁 같은 티켓팅을 치러 겨우 예매를 할 수 있었다”면서 “원래 팬이었다. ‘방랑자 환상곡’을 직접 들을 수 있어 기대된다”고 했다.

올해 클래식계는 코로나19로 굵직한 공연들이 사실상 전멸했다. 지난 5월 도이치그라모폰(DG)에서 신보 ‘방랑자’를 발표한 조성진도 당초 7월 리사이틀 투어에서 국내 관객을 만날 예정이었으나 팬데믹 여파로 결국 공연을 연기했다.

이날 공연은 기다린 시간만큼 눈덩이처럼 불어난 팬들의 갈증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오후 3시와 7시30분 2회로 진행되는 이번 리사이틀은 독특하게도 각각 다른 레퍼토리로 구성됐다. 낮 공연은 슈만의 ‘숲의 정경’과 시마노프스키 ‘마스크’,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을 연주하고, 저녁 공연에서는 슈만 ‘유모레스크’와 시마노프스키 ‘마스크’,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 B단조를 연주하는 식이다.


4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연주를 펼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조성진이 ‘숲의 정경’ ‘마스크’ ‘방랑자 환상곡’으로 완성한 이야기는 우아한데 개성적이었다. 곡들 저마다 본 형태를 얼마간 유지하면서도 조성진의 기교로 새롭게 탈바꿈했다. ‘숲의 정경’은 부드러우면서 유쾌했고 ‘마스크’는 변칙적 선율 안에 비극적 정서가 묻어났다. ‘방랑자 환상곡’은 감정적 고양에 다다르게 하는 힘이 돋보였다. 빠르게 활보하는 그의 손과 리드미컬한 몸의 움직임도 인상적이었는데 곡의 정점에서는 때로 의자가 뒤로 밀리고 타건에 상체가 들릴 정도로 격렬한 연주를 펼쳤다. 얼굴과 귀가 붉어지기도 했다.

특히 ‘마스크’는 관객에게 이채로운 감상을 선사했을 듯하다. 슈베르트 본인도 “너무 어렵다”고 고개를 저은 ‘방랑자 환상곡’ 만큼이나 ‘마스크’도 까다로운 곡으로 꼽힌다. 테크닉도, 악보도 난해해서 실제 공연으로 마주하기 쉽지 않은 곡이기도 하다. 완급을 조절하면서 격정적인 장면으로 관객을 이끈 조성진은 “이 곡은 유럽 무대에서 자주 연주하지 않아 소개하고 싶었다”면서 “한번 들으면 못 잊을 것 같은 귀에 꽂히는 멜로디는 없어도 듣다 보면 계속 생각이 날 음악”이라고 소개했다.

본래 70분인 공연은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약 100분간 이어졌다. 조성진이 선보인 앙코르는 ‘방랑자 환상곡’과 함께 신보 수록곡인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였다. 저녁 공연까지 미처 보지 못하는 팬들을 생각한 것일까. 조성진은 30분에 걸쳐 아직 다 풀어놓지 못한 열정과 그간의 노력을 펼쳐 놓았다. 관객의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무대를 시작할 때 조성진 얼굴 위로 피어났던 옅은 미소는 자신감이었던 셈이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