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표정 이춘재 “올 것이 왔구나, 연쇄살인 14건 모두 내가”

입력 2020-11-02 17:46 수정 2020-11-02 20:47

34년 전 ‘살인의 추억’을 말하는 이춘재(56)는 감정 변화 없는 덤덤한 목소리를 한결같이 유지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에 왜 그런 생활을 했는지 정확하게 답을 못하겠다. 계획을 하고 준비를 해서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사유인지는 모르고 당시 상황에 맞춰 (살인을) 하지 않았나 생각을 한다.”

수원지법 형사12부(박정제 부장판사) 심리로 2일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9차 공판 증인으로 나선 이춘재가 이날 오후 무표정한 상태로 법정에 섰다. 청록색 수의를 입고 하얀색 운동화를 신은 채였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는 군데군데 흰머리가 성성했다.

이춘재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증인선서를 한 뒤 자리에 앉아 변호인 측과 검찰 측 신문에 시종일관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진범 논란’을 빚고 있는 이 사건을 비롯해 관련 사건 모두 ‘자신이 진범’이라고 말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청구인 윤성여(53)씨와 피해자들에게는 사죄했다. 이춘재는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가서 (윤씨의) 앞으로의 삶이 더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저로 인해 죽은 피해자들의 영면을 빌며, 유가족과 사건 관련자 모두에게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또 “제가 저지른 일은 앞으로 없어질 수 없다”며 “모든 분에게 반성하고 또 반성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춘재에 대한 증인 신문이 진행되는 동안 이춘재를 바라보거나 천장을 응시하던 윤씨는 착잡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춘재가 쏟아내는 말들은 일반인의 사고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였다. 7살 어린이부터 70대 노인까지 가리지 않고 범행을 저지른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준이나 계획 없이 그날 마주친 대상에 대해 순간적인 생각으로 범행했다”고 대답했다.

손에 대한 집착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원래 손이 예쁜 여자가 좋다”며 “얼굴, 몸매 이런 건 (범행대상을 고를 때) 보지 않고 손이 예쁜 게 좋다”고 답했다. 장기간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데 대해선 “나도 내가 왜 안 잡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당시 경찰들이 보여주기식으로 수사를 한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도 봤지만 “그냥 영화로만 봤고, 별 감흥이 없었다”고 했다.

경찰이 2019년 9월 16일 부산교도소를 방문해 조사할 때 범행 일체를 자백한 것과 관련, 이춘재는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하다가 전문프로파일러와 대화를 하면서 범행 전모를 자백했다”고 털어놨다. “영원히 묻힐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다. 좀 늦어진 겁니다”라며 자신의 범행이 언젠가 드러날 것이라고도 했다.

이춘재는 1차 경찰 접견 조사 때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자신의 DNA가 검출된 사실을 알게 된 이후인 같은 달 24일 이뤄진 4차 접견 조사에서부터 8차 사건을 포함해 모두 14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서 박모(당시 13·중학생)양이 성폭행 당한 후 살해당한 사건이다. 이듬해 범인으로 검거된 윤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소하면서 “경찰의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며 혐의를 부인했으나 2심과 3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기각했다.

20년을 복역하고 2009년 가석방된 윤씨는 이춘재의 범행 자백 이후인 지난해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올해 1월 이를 받아들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과 변호인 모두 이춘재를 증인으로 신청했으며,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증인 신문을 진행했다. 재판부는 이춘재가 증인의 지위에 불과하다며 촬영을 불허해 언론의 사진·영상 촬영은 이뤄지지 못했다. 다만 이춘재의 증언에 국민의 관심이 높은 점을 고려해 88석 규모(사회적 거리두기로 44석 운용)의 본 법정뿐만 아니라 별도의 중계법정 1곳을 마련해 최대한 많은 방청객이 재판을 방청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이춘재는 1994년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5년째 복역 중이다. 모범적인 수형생활로 1급 모범수가 돼 가석방 기회가 있었지만, 연쇄살인 사건 범인으로 특정되고 자백함에 따라 특별사면이나 가석방의 기회는 사실상 사라졌다.

우리나라 강력범죄 사상 최악의 장기미제 사건으로 남아온 1980, 90년대 경기도 화성 일대에서 주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연쇄살인으로는 처벌받지 않는다.

수원=강희청 기자 kangh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