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묻힐 것이라는 생각은 안했다. 좀 늦어진 겁니다.”
오후 1시36분쯤. 하얀색 운동화에다 청록색 수의를 입고 마스크를 쓴 채 이춘재(56)가 무표정한 상태로 법정에 들어섰다.
이춘재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증인선서를 한 뒤 자리에 앉아 변호인 측과 검찰 측 심문에 시종일관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원지법 형사12부(박정제 부장판사) 심리로 2일 열린 이춘재 8차 사건 재심 9차 공판에 출석한 이춘재는 ‘진범 논란’을 빚고 있는 이 사건을 비롯해 관련 사건 모두를 ‘자신이 진범이다’며 공개 법정에서 재확인했다.
첫 사건 발생 34년 만에 일반에 모습을 드러낸 이춘재는 변호인 측과 검찰 측의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시종일관 무표정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진술했다.
변호인 측이 먼저 심문했다.
2019년 9월 18일 경찰이 부산교도소를 방문해 조사할때 범행 일체 자백과 관련해서 이춘재는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하다가 전문프로파일러와 대화를 하면서 범행 전모를 자백했다”고 털어놨다.
이춘재는 “프로파일러들과 대화하면서 자연스레 마음이 바뀌었다”면서 “(자신의)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삶 전부에 대해 얘기하면서 범행 전모를 스스로 말했다”고 했다.
당시 이춘재는 9월 18일 수감 중인 부산교도소에서 진행된 1차 경찰 접견 조사 때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자신의 DNA가 검출된 사실을 알게 된 이후인 같은 달 24일 이뤄진 4차 접견 조사에서부터 8차 사건을 포함해 모두 14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털어놨다.
이춘재는 변호인 측의 질문에 자신의 범행이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라고도 했다.
이춘재는 “영원히 묻힐 것이라는 생각은 안했다”면서 “좀 늦어진 겁니다”라고 했다.
이춘재는 경찰이 방문조사를 왔을때 “올 것이 왔구나”며 “가족 등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갔다”고 회상했다.
이춘재는 초등학생 살인사건의 피해자 가족이 자신을 면회왔을때 만난 이유에 대해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줄 수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응했다”고 했다.
이춘재는 변호인 측과 검찰 측의 심문 동안에 무표정한 상태로 담담하게 진술을 이어갔다.
이춘재에 대한 증인신문이 진행되는 동안 증인석 우측의 피고인석에 앉은 재심 청구인 윤성여(53)씨는 가끔씩 이춘재를 바라보거나 천장을 응시하며 담담하게 재판을 지켜봤다.
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서 박모(당시 13·중학생) 양이 성폭행 피해를 본 뒤 살해당한 사건이다.
이듬해 범인으로 검거된 윤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소하면서 “경찰의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며 혐의를 부인했으나, 2심과 3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기각했다.
20년을 복역하고 2009년 가석방된 윤씨는 이춘재의 범행 자백 이후인 지난해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올해 1월 이를 받아들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과 변호인 양측은 모두 이춘재를 증인으로 신청했으며,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이날 증인 심문을 진행했다.
이춘재가 법정에 나와 일반에 공개된 것은 그가 자백한 연쇄살인 1차 사건이 발생한 1986년 9월로부터 34년 만이며, ‘진범논란’을 빚은 8차 사건이 발생한 1988년 9월로부터 32년 만이다.
재판부는 이춘재가 증인의 지위에 불과하다며 이날 촬영을 불허해 언론의 사진·영상 촬영은 이뤄지지 못했다.
다만 이춘재의 증언에 국민의 관심이 높은 점을 고려해 88석 규모(사회적 거리두기로 44석 운용)의 본 법정 뿐만 아니라 별도의 중계법정 1곳을 마련해 최대한 많은 방청객이 재판을 방청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수원=강희청 기자 kangh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