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선 “40대 여배우 삶이 더 좋아요”[인터뷰]

입력 2020-11-02 05:00
힌지엔터테인먼트 제공

40대, 유부녀, 엄마. 예전이라면 여배우에게는 장벽이었을 조건들. 이 모든 걸 뛰어넘은 김희선의 수식어 중 단연 으뜸은 배우다. 1993년 데뷔 당시부터 신드롬급 인기를 얻은 그는 40대인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 대표 배우다. 1인 2역, 장르물, 예능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는 김희선은 최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이를 낳고 복귀한 여배우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많아져 좋다”며 “수동적이었던 20대와 달리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된 40대 여배우의 삶이 더 좋다”고 말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돌아오면 주인공의 엄마나 이모 역할을 많이 했어요. 당시엔 ‘저게 내 미래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세상이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장르가 로맨스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화한 덕분이죠.”

최근 종영한 SBS 금토 드라마 ‘앨리스’는 죽음으로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 남녀가 시간과 차원의 한계를 넘어 다시 만나면서 벌어지는 휴먼 SF 드라마다.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마지막 회는 수도권 기준 시청률 9.8%(2부)를 기록하며 동 시간대 전 채널 1위이자 금토 드라마 1위를 차지했다. 광고주 주요 지표인 2049 시청률도 5%대로 동 시간대 전 채널 1위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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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은 평행우주에서 살아가며 시간여행의 비밀을 밝히려는 천재 물리학자 윤태이와 시간여행자이면서 비밀의 열쇠를 쥔 미래의 과학자 박선영까지 1인 2역을 소화했다. 윤태이는 20대, 박선영은 40대로 김희선이 연기 스펙트럼을 한층 넓혔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청자들이 ‘김희선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할 때 ‘이번에도 나름대로 잘 해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배우가 되려고 해요.”

어느 순간부터 김희선에게 ‘도전’이란 뗄 수 없는 수식어가 됐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토마토’ ‘미스터Q’ ‘슬픈연가’ ‘요조숙녀’ 등 청초하고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 역을 줄곧 맡아왔던 그는 출산 후 역할 변화를 꾀했다. 2012년 복귀작 SBS ‘신의’에서는 고려 시대의 무사와 시공간을 초월해 사랑을 나누는 현대의 의사로 변신했고, 2014년 KBS 2TV ‘참 좋은 시절’에서는 사투리 연기를 선보였다. 여느 톱 배우와는 달리 신비주의를 내려놓고 tvN ‘토크몬’과 ‘섬총사’ 등 예능에도 모습을 드러냈고 JTBC ‘품위있는 그녀’에서는 연기력 정점을 찍었다.

이번 도전은 SF 장르였는데, 시공간을 초월해 20대와 40대를 오갔다. 40대인 김희선이 20대를 연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사실 20대가 어땠는지 오래돼서 생각이 잘 안 나요.(웃음) 그래서 당시에 찼던 아이템으로 차이를 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1999년 SBS 드라마 ‘토마토’ 당시 착용했던 머리띠와 곱창밴드로 포인트를 줬죠. 겉모습은 어느 정도 감출 수 있었는데, 목소리가 관건이었어요. 20대 특유의 당찬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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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은 이 길을 지나간 선배들의 발자취를 지키고 싶은 의무감과 후배 여배우들이 지나가야 할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다. “예전에는 도전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어요. 하지만 선배들을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었죠. 김희애 선배님이나 김혜수 선배님 같은 분을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돼야겠다’하는 의무감이 생기더라고요. 도전하는 절 보면서 후배들이 같은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인기 비결을 묻자 ‘솔직함’이라는 답이 나왔다. 김희선이 활동하던 30여 년 전만 해도 여배우는 신비로워야 했다. 하지만 그는 데뷔 후 한순간도 신비주의를 고집하지 않았다. 누군가 “주량이 얼마나 되냐”고 묻는다면 그는 “소주 두 병에서 네 병까지는 마신다”고 답하곤 했다. 이런 점 덕에 후배 여배우들의 롤모델로 꼽히기도 한다. “저는 신비로웠던 적이 없어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아예 말을 하지 않는 방향을 선택했어요. 제가 신비주의를 선택했다면 지금까지 활동할 수 있었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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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 이미 정상을 찍고 40대로 접어든 김희선에게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무엇이냐 물었더니 “철이 들었다”며 웃었다. “20대에는 뭘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신인이니까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 뒤를 돌아보니 모두가 절 이해해준 거였어요. 지금은 그때처럼 철없이 못 하죠. 제 말이 어떤 영향을 불러올지, 제 행동이 어떤 의미가 될지 깊게 생각하게 됐어요.”

‘앨리스’ 속 상황처럼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찬란했던 20대로 돌아가겠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20대 때 정말 원 없이 일했어요. 다시 그렇게 하라면 아마 못할 것 같아요. 당시에는 불안함이 컸어요. 금방이라도 인기가 사그라들까 봐 쉬지 않고 작품을 찍었어요. 제 선택과 의지가 아닌 순간도 많았죠. 지금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됐고, 감독님께 연기에 대한 의견을 낼 정도의 경험도 쌓였어요. 전 지금이 좋아요.”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