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여섯 살 때, 우리 가족이 저녁을 먹으려고 밥상에 빙 둘러앉았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 총을 쐈어. 형들 다 죽고,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인천으로 끌려가 옥살이했는데. 그건 시작이었지…나 억울한 거? 군인(토벌대)들이 죄 없는 우리 가족 총으로 쏜 거. 죄 없는 내가 옥살이하고 총을 세 번이나 맞은 거. 사면된 후에도 범죄자 낙인이 찍혀 예순이 될 때까지 타지에서 농장 밥 먹으며 산 거. 그래서 우리 아이들 6남매. 공부 제대로 못 한 거. 너무 억울해.” (생존 수형인 양근방씨의 진술 일부)
29일 제주4·3이 발생한 지 72년 만에 국가를 상대로 한 첫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시작됐다.
제주지법 제2민사부(재판장 이규훈)는 이날 오전 301호 법정에서 양근방(88) 할아버지 등 4·3 생존수형인 18명과 유족 21명이 제기한 국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첫 변론기일을 열었다.
원고 39명은 지난해 11월 29일 국가를 상대로 수형 기간에 따라 3억원에서 15억원까지 100억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1월 사실상 무죄를 뜻하는 공소기각 판결 이후 1년9개월여 만이다.
이날 재판에서 4·3 생존수형인들은 불법 구금이나 폭행, 고문 등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국가를 대리하는 피고 측은 제출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고, 소멸시효가 완성됐으며, 103억원에 이르는 청구 금액이 과하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개별적인 피해 사실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증거를 추가로 제출해 줄 것을 원고 측에 요구했다.
향후 재판은 수형인과 유족의 피해 입증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원고 측 변호인단은 재판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미 간첩 조작사건과 같은 과거사 사건에서 객관적인 증거없이도 당사자의 진술을 증거로 채택한 사례가 있다”며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정리해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시효의 경우 “일반적인 국가 채무 시효가 아니라 이들이 4·3 피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형성된 시점을 기준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앞서 수형인들이 피고석에서 국가를 상대로 자신들이 받은 군사재판이 불법이었다는 주장으로 승소 판결을 받았다면, 이번 재판은 국가가 피고가 돼 원고의 피해에 대해 국가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답변해야 하는 차례가 된 것”이라며 “재판부로 하여금 원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게 할 것”이라고 했다.
이번 재판 결과는 4·3특별법 개정안의 핵심인 배·보상 금액의 기준이 될 수 있어 제주도 밖에서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앞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직후 민간인 학살에 대해 국가 손해배상을 청구해 희생자 유족들이 일정액의 손해배상금을 받았지만, 4·3특별법 개정안은 배·보상 금액 산정 기준이 없는 상태다. 4·3특별법 개정안은 지난 26일 국정감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오는 11월 이후에야 첫 법안 심사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2차 변론기일은 내년 1월 28일 오후 2시10분 제주지법 301호 법정에서 열릴 예정이다.
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무자비한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현대사 최대 규모의 민간인 희생 사건임에도 불구, 이념 대립과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진상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반세기의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지난 2000년에 이르러서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제주4·3 평화공원 조성, 경찰과 국방부의 유감 표명 등의 진전을 보였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