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오는 2050년까지 탄소 배출을 제로화하는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세계 3위 규모의 경제권이면서 세계 5위의 석탄 소비국인 일본은 그간 지구온난화 대응에 미온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국내외에 석탄 화력발전소를 건설해 국제 환경단체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아왔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지난 26일(현지시간) 첫 국회 소신표명 연설에서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를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스가 총리는 “더 이상 지구온난화에 대응하는 것이 경제 성장의 제약이 될 수는 없다”면서 “‘지구온난화에 선제적으로 대처하면 경제·사회는 물론 산업구조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는 식으로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가 총리가 발표한 이번 목표는 앞서 일본 정부가 정했던 ‘2050년까지 탄소 배출 80% 감축’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새로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신재생에너지를 최대한 도입하고 원자력 정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27일 교도통신 등 현지 언론들은 스가 총리의 선언이 국제사회의 탈탄소 흐름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계 최대 석탄 소비국인 중국은 지난달 유엔총회에서 2060년 이전까지 탄소 배출을 실질적으로 제로화하는 탄소중립화 계획을 발표했다.
아사히 신문은 “스가 총리의 탄소중립 선언 이면에는 사실상 일본이 국제적인 탈탄소화 추세에 뒤쳐지고 있다는 위기 위식이 있다”면서 “가지야마 히로시 경제산업상과 고이즈미 신지로 환경상이 국제사회 흐름에 발맞추는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조속한 액션’을 조언했을 수 있다”고 전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중국의 탄소중립 선언과 조 바이든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의 당선 가능성에 대한 전망이 스가 총리의 발표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
다만 일본 정부의 탄소중립 선언에는 목표만 있고 구체적인 시행 계획이 없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기술 혁신을 통해 탄소중립을 실현하겠다고 밝혔지만 신재생 에너지와 원자력 발전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지, 석탄 화력을 얼마나 제한할 것인지 등에 대한 내용은 없다는 것이다.
아사히 신문은 이날 ‘탄소중립 전략을 보여달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미 120개 국가가 50년 안에 탄소제로 사회를 만들겠다는 선언을 했다”면서 “일본 정부의 선언은 오래 기다려왔던 일이지만 노력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술 혁신은 탄소배출을 줄이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개발 완료 시점이 불확실한 기술에만 의존한다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고 “화석연료 발전을 줄이고 신재생 에너지 사용을 확대하는 방법, 탄소세와 탄소배출권 거래제 도입 등 기술적인 발전 없이도 할 수 있는 일들을 먼저 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스가 총리의 이번 선언이 일본 내 원자력 발전 증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도쿄신문은 “스가 총리가 온실가스 실질 제로의 실현을 이유로 전면에 내세울 것 같은 것이 원전 추진”이라면서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후 정부가 표면적으로 논의하지 않았던 추가 증설 움직임이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 “이번 달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논의하는 전문가 회의에서 ‘재생에너지만으로는 탈탄소화를 할 수 없다’면서 새 원전 증설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왔다”고 덧붙였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일본의 전력생산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에 따른 원전 가동 중단 등의 여파로 2018년 기준 6%에 불과했다.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는 17%, 석탄·석유·액화천연가스(LNG) 등 화력은 77%를 차지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에너지 기본 계획을 보면 2030년 기준 원전 비중은 재가동 등 영향으로 20~22%로 늘어난다. 신재생 에너지는 22∼24%, 화력은 56%다.
마이니치신문은 “정부와 자민당 내에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원전의 개축이나 신증설, 어느 쪽이든 발을 들여놓지 않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확증이 없다”고 지적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