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밀린 택배 좀” 부탁하고 숨진 기사, 택배공화국의 비극

입력 2020-10-25 15:47
지난 24일 서울 중구 한진택배 본사 앞에서 청년하다 등 단체 관계자들이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13명. 택배공화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에서 올 한해 과로로 세상을 떠난 택배노동자의 숫자다. 국민일보는 지난 닷새간 ‘우리의 편리’를 위해 일하다 떠난 택배노동자 유족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의 고단했던 삶을 들여다 보았다.

경남 김해에서 CJ대한통운 위탁업체의 택배기사로 일하던 서형욱(47)씨는 지난 6월 28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응급수술 후 간신히 회생한 그가 눈을 뜨자마자 찾은 것은 휴대전화였다.

동료 택배기사에게 황급히 전화를 건 서씨는 밀린 택배 처리를 간곡히 부탁했다. 당분간 택배 일을 할 수 없다는 의사에 말에 그는 경기도에 사는 지인에게 한 달만 ‘자신의 구역’을 맡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씨는 끝내 현장에 복귀하지 못한 채 지난 7월 5일 급작스런 심정지로 세상과 작별했다.

8년간 택배기사로 일해온 서씨는 정년까지 일할 작정이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택배 업무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수차례 사업 실패를 경험한 그에게 일한 만큼 수익이 돌아오는 택배일은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몸은 고단했지만 주 6일 근무를 하며 밀린 채무도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올해 70대 노부모와 함께 살던 낡은 집을 재건축하겠다는 계획도 세운 터였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서씨의 삶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4월부터 숨지기 직전까지 하루 평균 300건을 배달했다. 회송이나 반품은 제외한 수치다. 이 기간 서씨의 한 달 수입은 평소보다 150만원 정도 올랐지만, 배송량 역시 100여건 늘었다.

지난 22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서씨의 누나 형주(48)씨는 “동생이 죽기 전 극심한 가슴 통증을 호소하면서도 배송이 늦어질까 걱정돼 병원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며 “제때 치료받을 여유만 있었다면 이렇게 황망히 떠나진 않았을 것”이라며 울먹였다.

서씨 사망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서씨 휴대전화엔 평소 그가 택배를 배달하던 지역 주민들의 추모 메시지가 이어졌다. 끼니도 걸러가며 일하던 서씨에게 요깃거리를 건네던 몇몇 주민은 영문도 모른 채 “왜 요즘 안보이냐”며 한동안 서씨를 찾기도 했다. 서씨 어머니는 차마 해지하지 못한 아들 휴대전화에 이런 문자메시지가 날아올 때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경남 김해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 고 서형욱씨가 사망한 후 서씨의 휴대전화에 구역 주민들의 추모 메시지가 이어졌다. 서형주씨 제공

경남 김해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 고 서형욱씨가 사망한 후 서씨의 휴대전화에 구역 주민들의 추모 메시지가 이어졌다. 서형주씨 제공

누군가의 편리를 위해 목숨까지 위협받는 택배노동자는 서씨 같은 택배기사 뿐이 아니다. 택배 분류작업자와 물류센터 간 택배를 운송하는 ‘간선 기사’ 등 택배산업 전반이 ‘과로 시스템’ 위에 놓여 있었다.

택배 화물차 운전기사 A씨(39)는 지난 20일 오후 11시50분쯤 경기도 곤지암허브터미널에 있는 간이휴게실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자동차 딜러로 일했던 A씨는 심장질환이 있었지만 2년 전 완치 판정을 받고 택배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2억원짜리 대형 화물차를 8년 할부로 구입해 CJ대한통운 위탁업체와 계약을 맺고 물류센터 간 택배를 운송했다. 장거리 전용 간선 차량을 운행하다보니 하루에도 수차례 곤지암과 대전, 남양주를 오갔다.

피로가 쌓였지만 A씨는 마음놓고 휴가조차 낼 수 없었다. 대체 근무자를 구하기 힘든 특수차량 소유 운전자였던 데다 매달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200만원 가량의 차량 할부금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언택트 시대가 열리면서 원청에서 내려오는 물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청 소속인 A씨로서는 늘어난 업무를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다.

A씨는 화물차 운전 뿐 아니라 물류터미널 안에서 컨테이너 상·하차 업무도 수행했다. 그런 A씨에게 숙면은 사치였다. 평일 오후 3시에 퇴근하면 한숨 잘 시간도 없이 집에서 땀만 씻어내고 오후 5시에 다시 현장에 나오는 일과가 반복됐다. 물량 폭증으로 대기시간이 늘어나면서 화물차 안에서 쪽잠을 자야하는 날도 많아졌다.

지난 22일 경기도 고양의 한 병원에 마련된 빈소에서 만난 A씨의 아버지는 아들을 앗아간 ‘택배공화국’의 현실에 개탄했다. “부산에서 어제 오후에 부친 택배를 서울에서 오늘 아침 받아보는 게 상식적인 사회냐”고 되묻던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깊은 슬픔이 배어났다.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 A씨가 수화기 너머로 건넨 이 말이 아버지와 아들의 마지막 대화가 됐다. A씨 아버지는 “아들이 편한 곳에 갔으니 더 이상 과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뒤 소리내어 울었다.

대구 쿠팡 택배노동자 고 장덕준씨가 업무시 입었던 옷가지들과 보호장구들의 모습. 왼쪽 아래 회색 옷은 장씨가 사망 당일 입었던 근무복이다. 가운데 상단에 파란색 무릎보호대 안쪽에는 장씨의 땀으로 절어 하얀 소금기가 남아있다. 필터 교환식 마스크에 붙어있는 고정 철사는 장시간 사용으로 끊겨져 있다. 대구=최지웅 기자

지난 12일 퇴근 후 집에서 샤워 도중 쓰러진 청년 장덕준(27)씨의 꿈은 ‘무기계약직 전환’이었다. 한 지방 산업대 로봇공학과를 졸업한 장씨는 취직이 여의치 않자 지난해 6월 택배 일에 발을 들였다. 체력을 최대 장점으로 여겼던 장씨는 택배 분류작업을 천직(天職)으로 여겼다.

장씨가 일한 쿠팡 대구물류센터 출고 파트는 주문이 접수되면 송장에 찍힌 상품을 찾아와 포장하는 곳이다. 주문자 대신 물류센터 안에서 쇼핑을 하고 택배기사에게 전해주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2년을 성실하게 일하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장씨는 주 5일 이상 일하기 위해 노력했다. 매일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였던 장씨는 ‘내일도 일하기 위해’ 하루하루 실적에 쫓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고 한다.

대구 쿠팡 택배노동자 고 장덕준씨가 입었던 청바지 두 벌에 달려있는 허리 라벨 모습. 장씨가 최근까지 입었던 왼쪽 청바지는 허리 치수가 80㎝이고 1년4개월 전 택배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입었던 오른쪽 청바지 허리 치수는 86㎝다. 장씨 아버지는 장씨의 몸무게가 최근 1년간 10㎏ 넘게 줄었다고 말했다. 대구=최지웅 기자

장씨의 시간당 처리물량은 초반에 80~90개 정도에 그쳤지만 일이 능숙해지면서 처리물량이 조금씩 늘어났다. 사망 직전에는 시간당 300건까지 처리 속도를 끌어올렸다. 수백평 규모의 창고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12초당 물건 1개를 처리했다는 뜻이다.

회사의 비인간적 대우도 감당해야 했다는 것이 유족의 주장이다. 장씨가 업무 중 소지하고 있는 장치에는 GPS(위치추적) 기능이 탑재돼 있어 장씨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관리자에게 보고됐다. 한숨 돌리려 2~3분만 제자리에 멈춰 서있어도 경고 전화가 날아온다는 것이 장씨 동료들의 설명이다. 이렇게 계속되는 채찍질에 장씨의 만보기에는 하루 5만보 이상이 찍히는 날도 있었다.

대구 쿠팡 택배노동자 고 장덕준씨가 사망 전에 해외직구로 주문해놓은 건담 프라모델 상자가 장씨 사후에 도착해 장씨의 방에 그대로 보관돼 있는 모습. 장씨는 목공수였던 아버지를 닮아 평소 조립하는 것을 취미생활로 즐겼다고 한다. 대구=최지웅 기자

매일 반복되는 새벽배송 마감시간도 그를 한계로 몰아갔다. 코로나 사태에 명절 물량까지 겹치자 마감 간격은 더 짧아졌고, 식사할 여유조차 없어 젤리와 에너지바로 때우는 날이 늘어났다. 1년 사이 몸무게는 10㎏이 줄어들었고, 홀쭉해진 허리 탓에 바지는 흘러내렸다.

방에 놓인 아들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아들은 노예이고 도구였다. 쓰다 버려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했다”며 쏟아지는 눈물을 간신히 삼켰다.

대구·고양=최지웅 김지애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