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속 ‘캣츠’, 한국이라 가능… 미국 못 했을 것”

입력 2020-10-21 15:15 수정 2020-10-21 15:38
올해 40주년을 맞은 세계적인 뮤지컬 ‘캣츠’ 내한 공연 중 한 장면(왼쪽)과 내한 공연팀의 모습(왼쪽부터 올드 듀터러노미를 연기하는 브래드 리틀, 그리자벨라를 맡은 조아나 암필, 럼 텀 터거로 변신하는 댄 파트리지). 에스앤코 제공

내한 뮤지컬 ‘캣츠’에서 올드 듀터러노미(선지자 고양이)를 연기하는 미국 국적의 브래드 리틀이 20일 인터뷰를 시작하며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이었다면 팬데믹 상황에서 이렇게 큰 공연은 못 했을 겁니다. 한국이라 가능했어요. 고맙습니다.” 나란히 앉은 조아나 암필(그리자벨라·매혹적인 고양이)과 댄 파트리지(럼 텀 터거·반항아 고양이)는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40주년을 맞아 내한한 세계적인 뮤지컬 ‘캣츠’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전 세계 공연장이 셧다운 된 상황에서 K방역으로 신뢰를 얻은 한국이기에 성사된 공연이다. 암필은 “뮤지컬 산업이 지속할 수 있도록 끈을 놓지 않은 한국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1981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T.S.엘리엇의 시에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음악을 입히고, 질리언 린의 안무를 더한 작품이다. 고양이들의 축제 ‘젤리클 볼’에 모인 젤리캣들의 이야기로, 20여 곡에 이르는 넘버는 고양이 각자의 독특한 삶을 반영했다. 리틀은 “무대에 오르는 배우 대부분 ‘캣츠’가 탄생하던 40년 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며 “역사적인 공연에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올해 40주년을 맞은 세계적인 뮤지컬 ‘캣츠’ 내한 공연 중 한 장면. 에스앤코 제공

파트리지는 책임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지금처럼 무대가 감사했던 적은 없었어요. 하지만 고향에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어떤 날에는 ‘이런 영광을 나 혼자 느껴도 될까’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요. 무대를 갈망하는 동료들의 열정을 모아서 더 잘 해내겠습니다.”

암필은 개막 날을 떠올리며 “첫 공연 날을 기억한다”며 “‘관객이 왔을까?’라는 생각은 처음 해봤다. (객석 거리두기 탓에) 예전처럼 빼곡하지는 않았지만, 관객이 객석에 절반이나 있었다. ‘믿고 와줬구나’라는 생각에 힘이 솟았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파트리지는 입국한 날을 기억했다. “한국에 와서 정말 많이 놀랐다”며 “한국인 모두가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모습을 보고 ‘아, 이래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거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2주 자가격리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특히 파트리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같은 팀에 있는 엘리 누넌과의 사연을 들려줬다. “2주가 끝나고 외출이 가능했던 날은 햇빛이 쨍쨍했어요. 호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엘리와 마주쳤어요. 인사도 제대로 한 적 없는 사이였는데 달려와 안기더라고요. 얼마나 외로운 순간들이었을지 그 마음을 잘 알겠더라고요.”

올해 40주년을 맞은 세계적인 뮤지컬 ‘캣츠’ 내한 공연팀의 모습(왼쪽부터 올드 듀터러노미를 연기하는 브래드 리틀, 그리자벨라를 맡은 조아나 암필, 럼 텀 터거로 변신하는 댄 파트리지). 에스앤코 제공

지난 7월 개막을 결정했을 때만 해도 상황은 괜찮았다. 당시엔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였는데, 공연을 보름가량 앞둔 상황에서 2.5단계까지 격상했다. 객석 거리두기 등 방역 수칙을 지키는 것은 큰일이 아니었다. ‘캣츠’의 정체성이 문제였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없애고 극장 전체를 고양이 놀이터로 활용하는데, 자유분방한 고양이들을 무작정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고육지책으로 꺼내든 카드는 고양이 분장을 옮겨 놓은 ‘메이크업 마스크’다. 불과 개막 일주일 전 나온 대책이다. 작품의 매력을 살리면서 코로나19를 정면으로 뚫어보겠다는 고민의 결과물이다. 리틀은 “이런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며 “예술을 예술로 승화하면서 또 다른 역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특히 인터미션 중에도 객석에 출몰하는 고양이들과 호흡하는 건 ‘캣츠’의 묘미다. 원래대로라면 관객과 포옹하고, 악수를 하지만 지금은 그루밍(고양이가 정서적 안정을 찾기 위해 하는 행동)을 하거나 ‘야옹’ 울어 대는 정도다. 교감 폭이 좁아 아쉽지 않으냐는 질문에 리틀은 고개를 저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마주한 관객이라 눈만 바라봐도 힘이 돼요. 매일 다른 방식으로 관객과 깊이 교감하고 있어요.”

올해 40주년을 맞은 세계적인 뮤지컬 ‘캣츠’ 내한 공연팀이 메이크업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 에스앤코 제공

마스크를 쓰고, 방역 수칙을 지키는 고양이들이라니. 여러 제약을 이겨내려는 듯 무대는 더욱 역동적이다.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내려놓은 ‘캣츠’는 그 틈을 로이드 웨버의 음악과 윈드밀, 아크로바틱 등 모든 장르의 안무로 가득 채우는데, 올해 버전은 군무 장면이 한층 진화했다. 파트리지는 “몸의 한계를 느꼈다”며 웃었다.

세트도 환상이다. 객석이 아닌 무대에서 이뤄지는 장면이 많아지면서 고양이들이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쓰레기 더미 등에 공을 들였다. 이 안에서 뛰노는 고양이들의 몸짓은 매혹적이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숙련된 배우들의 동작은 고양이의 가벼운 움직임을 그대로 형상화했다.

파트리지는 고양이 탐구 과정이 흥미로웠다. “손목을 살짝 돌리는 동작도 고양이처럼 해야 해요. 인간이 저마다 다르듯, 우리도 각각 성향에 맞게 행동하죠. 몸집이 큰 고양이는 굼뜨고, 새끼 고양이는 두려움이 없죠. 저 같은 청년 고양이는 동작이 크고 공격적이에요.”

40주년과 팬데믹. 영광과 위기를 동시에 떠안은 ‘캣츠’의 가치를 묻자 암필은 “침체한 사회에서 공연이 갖는 힘이 있다”며 “작품과 배우와 관객은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12월 6일까지 서울 샤롯데씨어터.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