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중고 에어컨 하나 없었다” 택배기사의 유서

입력 2020-10-21 10:28 수정 2020-10-21 10:37
A씨가 동료에게 보낸 유서. 연합뉴스

“억울합니다. 그들이 책임을 다했다면 이런 선택은 없었을 겁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택배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로젠택배 부산 강서지점에서 일하던 그는 20일 오전 2시30분쯤 동료에게 2장짜리 자필 유서를 촬영해 전송하고는 결국 세상을 등졌다.

21일 전국택배노동조합과 경남 진해경찰서에 따르면 극단적 선택을 한 택배 노동자 A씨의 유서는 ‘억울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 뒤로는 직장 내 갑질과 열악한 근무 환경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A씨는 유서에서 “우리는 이 일을 하기 위해 국가시험에, 차량 구매에, 전용 번호판까지 준비해야 하지만 200만원도 못 버는 게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이어 “한여름 더위에 하차 작업은 사람을 과로사하게 만드는 것을 알면서도 150만원이면 사는 중고 이동식 에어컨을 사주지 않았다” “(부지점장이) 화나는 일이 생겼다고 하차작업 자체를 끊고 먹던 종이 커피잔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화를 냈다. 우리를 직원 이하로 보고 있음을 알았다”고 토로했다.

또 대리점 측이 비트코인에 투자하면서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지점에 투자하지 않았고, A씨가 퇴사를 희망하자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압박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A씨는 사망 직전까지 본인 차량에 구인 광고 안내문을 붙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3개월 전에만 사람을 구하든지 책임을 다하려고 했다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은 없었을 것”이라고 남겼다.

로젠택배 측은 대리점 갑질이 극단적 선택의 이유 중 하나라는 주장은 억측이라고 반박한 상태다. A씨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한 사실이 없으며 내달 계약이 종료될 예정이었다는 입장이다. 퇴사 시 후임자를 데려오는 조건은 계약서에 명시된 것이라는 해명도 덧붙였다.

그는 동료에게 보낸 유서 외에 부모에게 5~6줄짜리 자필 유서를 남긴 것으로 확인됐다. 여기에는 “생활고에 시달려 빚이 많으니 상속을 포기하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겼다. 경찰 관계자는 “A씨 가족과 지인 등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평소 채무가 많았고 경제적 어려움을 자주 호소해온 것으로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A씨의 죽음으로 올해 목숨을 잃은 택배기사는 11명이 됐다.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일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한 국정감사에서 “(고인은) 과도한 권리금 등을 내고 일을 시작했고 차량 할부금 등으로 월 200만원도 못 버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며 “수입이 적어 신용도가 떨어지고 원금과 이자 등을 한 달에 120만원 정도 부담하고 있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문지연 기자 jy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