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에서는 ‘여자’선수가 아니라 ‘선수’니까요. 다른 요소에 가려지지 않도록, 선수의 기량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게 감독이 할 일이에요.”
WK리그 경주 한수원의 첫 여성감독 송주희(43) 감독은 올해 돋보였다. 초보감독인 그의 지휘 아래 경주는 지난 시즌까지 리그 7연패에 빛나는 디펜딩챔피언 인천 현대제철을 턱밑까지 따라붙었다. 지난 15일 마지막 라운드 뒤 양팀 사이 승점차는 겨우 1점. 인천이 리그를 지배한 8년 동안 가장 위협적인 상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 감독은 합리적으로 분업화한 훈련과 ‘큰언니’스러운 따뜻한 리더십으로 팀을 움직였다.
송 감독은 정규리그 일정이 끝난 다음날 팀이 있는 경주에서부터 자택이 있는 경기도 양주로 홀로 4시간 넘게 차를 몰아 돌아왔다. 시즌 내내 주말마다 친정과 시댁에 맡긴 두 아이를 보러 달린 길이다. 정규리그가 종료됐지만 그는 여전히 쉴틈이라고는 없다. 19일부터는 다시 팀으로 돌아와 3주 뒤 있을 수원도시공사와의 플레이오프 단판 승부, 여기서 이긴다면 이어질 인천과의 챔피언결정전을 다시 준비해야 한다. 국민일보와 전화로 인터뷰한 17일에도 송 감독은 종일 아이들과 바쁜 하루를 보낸 터였다.
송 감독의 선전을 비롯해 올 시즌은 여자축구 역사에 기념비적 해였다. WK리그 8개 구단에 여성 감독이 4명. 타 종목에서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높은 비율이다. 최근 수년 사이 남성 지도자들이 선수에게 폭행이나 성폭력 등 사례가 빈번했던 게 직접적 변화의 원인이었다. 송 감독 역시 9년간 코치 생활을 한 화천 KSPO를 떠나 첫 지휘봉을 잡았다. 2003년 사상 첫 여자월드컵에 진출했던 송 감독 등 선수 1세대는 이제 지도자로서도 새 시대를 맞았다.
8팀 中 4팀 女감독…여자축구의 새 시대
송 감독 부임 전인 지난 시즌 경주는 정규리그 2위를 했지만 디펜딩챔피언 인천의 아성을 위협하기에는 모자랐다. 인천과의 승점차는 27점, 경쟁자라고 보기도 민망한 점수였다. 그러나 올 시즌 경주는 보은 상무에게 당한 1패를 제외하면 패배가 없다. 특히 인천에게는 3번의 맞대결 중 2승 1무로 압도했다. 마지막 라운드까지 12연승이라는 대기록도 썼다. 인천의 유일한 맞수로 불렸으나 지금은 해체된 이천 대교보다도 오히려 강력한 모습이다.
그가 생각하는 여성 지도자의 강점은 ‘선수다운’ 모습을 온전히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다움, 즉 성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감독과 선수 모두 제대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송 감독은 “여자축구가 발전한 일본에 가보니 선수나 지도자 중 그 누구도 훈련 중 몸을 부딪히며 태클하길 꺼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저 역시도 선수 시절 마찬가지였지만 국내에서는 여성들에게 사회적으로 기대하는 부분이 있고 또 같은 맥락에서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에 남성 지도자와 여성 선수 모두 영향을 받는다”며 “여성 지도자는 그런 점에서 아무래도 자유롭다”고 설명했다.
선수들로부터 신뢰를 이끌어내기에 더 낫다는 점도 송 감독이 생각하는 여성 지도자의 장점이다. 그는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저를 믿고 따르는, 둘 만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느꼈다”면서 “훈련장 바깥에서는 모르는 척하고 져주고 해야할 때가 있다. 그렇게 생기는 여자들끼리 특유의 연대감이라는 게 분명 있다”고 설명했다. 이 모두가 결국 선수가 가진 최상의 기량을 이끌어내기 위한 지렛대다.
갑작스레 찾아온 여성 감독 시대지만 송 감독은 그 때문에 져야할 책임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워낙에 여자축구 인프라가 많지 않기 때문에 조금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 다시 여성 지도자들이 갈려나갈지 모르는 일이다. 경각심을 가지고 있다”면서 “세대가 바뀌어 다시 남성 지도자들이 더 많아진다 해도, 여성 지도자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가 나올 만큼 저희가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쉽지 않은 감독·가정 ‘투잡’ 생활
화천 KSPO에서 코치로 일할 당시만 해도 송 감독은 가정으로 출퇴근이 가능했다. 하지만 경주 감독을 맡으면서는 주중에 일하고 1~2주에 한 번씩 왕복 8시간을 운전해 돌아와야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나마도 역시 축구인인 남편의 이해, 아이들을 돌봐준 친정과 시댁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감정적으로 힘들어 홀로 눈물을 쏟았던 적도 있다. 그는 “언젠가 아이가 ‘엄마 꼭 가야 돼?’라고 물었을 때가 기억난다. 나름 열심히 참다가 얘기했을 텐데…”하고 회상했다.
그러던 아이들도 요즘에는 송 감독을 부쩍 자랑스러워 한다. 그는 “아이들이 유튜브로 경기 중계와 제 인터뷰를 보고서는 스타감독이라면서 ‘인터뷰한 소감이 어떻냐’고 묻는다”며 웃었다. 그는 “아이들이 저를 집에서 밥해주는 사람이라고 여기기보다 같이 놀아주거나 축구 해주고, 공부 시키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면서 “공부 시키는 것만 빼면 다 좋다고 한다. 주말에 몰아서 아이들을 한번에 공부시키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그가 이끄는 경주는 다음달 9일 정규리그 3위 수원과 플레이오프 단판 경기를 치른다. 이 경기 승자는 다음달 12일과 16일 인천과 챔피언결정전 1·2차전을 치러 최종우승자를 가린다. 경주 선수 6명은 휴식기 동안 열리는 여자 대표팀과 20세 이하 팀 경기에 대표팀 소속으로 소집됐다. 송 감독은 “선수들 근력이 줄지 않게 휴식과 훈련을 번갈아가며 병행할 계획”이라면서 “마지막 경기에는 남편과 아이들을 꼭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