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가르치는 비영리 교육기구 공자학원의 교사임용·교육내용 등 학원 운영 전반이 중국 당국의 통제 아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중국 교육 당국의 입김이 작용할 수 있는 계약을 맺은 공자학원이 국내에서 중국과 관련된 역사왜곡 교육을 실시하는 길을 터준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다.
미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는 이념 선전 의혹으로 공자학원 폐쇄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공자학원 관리·감독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공자학원은 중국이 한국을 포함해 세계 162개국에 설립한 비영리 교육기구다.
국민일보는 18일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을 통해 공자학원이 개설된 국내 대학 10곳과 중국 교육부 직속기관인 ‘중국국가한어국제보급영도소조판공실(국가한판) 공자학원총부’가 체결한 계약서를 입수했다.
국민일보와 조 의원이 이들 계약서를 분석한 결과, 국내 공자학원은 교육 운영 및 교사 채용, 예산 집행까지 공자학원총부의 통제가 강하게 작용하는 구조인 것으로 확인됐다. 공자학원 계약서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계약서 내용은 양측 계약서를 ‘기밀문건’으로 한다는 계약서 조항에 따라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이들 계약서에는 ‘학원은 본부의 교육평가를 받아야 한다’ ‘중국 측이 지원한 경비는 본부의 관리규정에 따라 집행되어야 한다’ 등의 조항이 포함돼 있다. 또 ‘이사회(양측 추천 인사로 구성)는 공자학원 교육과 학습, 연구 및 경영 방면의 중대사항 결정, 원장의 임면, 예산 및 결산 심의 의결 등 공동설립 쌍방에 대한 중대사항을 (양측에) 보고한다’ ‘(한국) 대학은 중국 측이 파견하는 교사 및 행정 요원의 입국 및 거주 수속을 지원한다’ 등의 조항도 있다.
조 의원은 “공자학원의 교육 운영 및 교사 채용 등에 공자학원총부의 통제가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계약서 조항상 중국 교육 당국은 한국 대학이 공자학원을 설립할 때 15만 달러(약 2억원)의 초기 설립 비용을 제공한다. 또 2억원 규모의 운영자금도 매년 지원하고 있다. 국내 대학들은 이런 자금 지원을 기반으로 수익을 낼 수 있어 공자학원 유치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공자학원은 시중 학원에 비해 저렴한 수강료와 중국 어학연수 등록금·기숙사비 지원 혜택을 앞세워 수강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외교부·교육부에 따르면 국내엔 23곳의 공자학원이 설립돼 있다. 23곳 중 16곳은 경희대 연세대 한양대 등 사립대학에, 6곳은 강원대 인천대 충남대 등 국립대학에서 운영 중이다. 나머지 1곳은 별도의 사단법인이다. 국립대학 6곳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강사는 28명이다. 사립대학 공자학원들은 중국인 강사 인원을 공개하지 않았다.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5개 공자학당도 개설돼 있다.
문제는 공자학원이 중국어와 중국 문화뿐 아니라 공산당 체제와 이념을 선전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국립외교원이 2018년 5월 펴낸 국제문제분석 보고서는 공자학원의 이념 선전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공자학원 온라인 플랫폼에 게재된 6·25전쟁 기원에 관한 영상자료는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조종, 한국전쟁을 확대하기 위해서 주로 미군으로 구성된 유엔사령부 조직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은 전 한반도를 장악하고자 했다’와 같은 중국의 공식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보고서는 공자학원의 커리큘럼에서 대만, 티베트, 신장, 중국 내 인권같이 민감한 이슈들은 제외되는 등 중국 정부와 공산당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은 6·25전쟁을 ‘항미원조전쟁’으로 칭하며 반미·애국주의를 고취하고 있다. 계약 조항에 따라 중국 교육 당국의 통제를 받는 구조인 국내 공자학원에선 이 같은 역사 왜곡 문제가 더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최근 방탄소년단(BTS)은 미국 비영리단체 코리아소사이어티가 수여하는 ‘밴플리트상’ 수상 소감에서 70주년을 맞은 6·25전쟁을 한국과 미국이 겪은 ‘고난의 역사’라고 표현했다가 중국에서 맹비난을 받았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국내 주요 기업은 중국에서 BTS 관련 광고를 모두 삭제하기도 했다.
공자학원은 현재 162개국에서 541개가 운영 중이다. 이념 선전 의혹이 불거지자 일부 국가는 공자학원 폐쇄 조치를 내렸다. 특히 미국 정부는 미국 내 모든 공자학원 폐쇄라는 강경 조치 시행을 선포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9월 “공자학원은 중국 정부의 글로벌 프로파간다와 악의적 영향력을 진전시키는 기관”이라며 연말까지 미국 내 공자학원을 모두 폐쇄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영국 여당인 보수당 인권위원회는 지난해 2월 공자학원이 공산당을 대변한다며 영국 대학들의 공자학원 협력을 중단하라고 권고했다. 2005년 유럽 최초로 공자학원 문을 열었던 스웨덴도 지난 4월 마지막으로 남은 1곳의 공자학원을 폐쇄했다. 중국 당국은 일부 국가의 공자학원 퇴출 움직임이 거세지자 지난 7월 공자학원을 민영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우리 정부는 공자학원을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주무부처인 교육부는 “공자학원이 각국의 외교안보를 위협한다는 의혹들과 관련해 현재 현황조사 외에 별도의 조치를 실시한 바 없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최근 국제사회에서 제기되는 공자학원 관련 사안들을 지속 주시 중”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했다.
조 의원은 “국내 공자학원이 학문적 자율성과 운영 투명성을 갖춰 본 취지에 알맞게 운영될 수 있도록 관계 당국이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관리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 정부는 경각심은커녕 기본적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