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민섭의 대기실] 쇼메이커와 말말말

입력 2020-10-16 03:06 수정 2020-10-16 03:50
라이엇 게임즈 제공

쇼메이커와 솔로 킬

‘리그 오브 레전드(LoL)’ e스포츠에서 ‘솔로 킬’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다. 딸 수도 있고,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솔로 킬을 내주는 걸 유독 자존심 상해하는 선수가 있다. 담원 게이밍 미드라이너 ‘쇼메이커’ 허수다.

“올해 개인적 목표는 라인전에서 솔로 킬을 안 당하는 거예요.” 허수는 지난 1월 ‘2020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스프링 시즌 개막을 앞두고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처럼 말했다. 그는 지난해 LCK 서머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T1 ‘페이커’ 이상혁에게 솔로 킬을 내준 것을 몹시 아쉬워하며 그처럼 말했다.

허수는 지난 3일 ‘2020 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그룹 스테이지 첫날 징동 게이밍(JDG)을 꺾은 뒤 진행한 화상 인터뷰에서도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대회에서 솔로 킬을 내주지 않는 걸 목표로 하겠다”고. 안타깝게도 그는 바로 3일 뒤인 9일 PSG 탈론(동남아)전에서 ‘탱크’ 박단원에 솔로 킬을 내줬다.

허수를 인터뷰하는 건 재밌다. 그는 화려한 언변의 소유자가 아니지만, 생각이 깊으며 LoL에 대한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기자와 같은 일반 유저들에게 쉽게 설명할 줄 안다. 그리고 솔로 킬과 관련한 개인적 목표처럼 인상 깊은 얘기들을 종종 한다. 그중 몇 가지를 이번 기사를 통해 전하고자 한다.

쇼메이커와 안 아프게 맞기

요즘 젊은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웹툰 유행어 중에 ‘안 아프게 맞기’란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아프지 않게 맞는 법이다. 그런데 기자는 1년도 전에, 지난해 6월 똑같은 말을 허수한테서 들었다.

한창 미드 카밀이 막 등장하던 시기였다. 당시 허수는 ‘카타리나 장인’으로 이름을 날렸고 아트록스, 이렐리아 등을 잘 다루기로도 유명했다. 카밀로 게임을 캐리한 날 그는 근접 AD 챔피언의 숙련도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치며 “안 아프게 맞는 법을 안다”고 했다.

“카타리나의 라인전 매커니즘이 근접 AD 챔피언들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이런 챔피언들이 대체로 초반에 원거리 챔피언에게 약하거든요. 안 아프게 맞는 법을 안다고 할까요. 맞아도 되는 스킬과 맞으면 안 되는 스킬을 구분해야 해요. 미니언 종류에 따라 상대 견제를 감수하면서 CS를 먹느냐, 포기하느냐도 선택해야 하고요. 저는 그런 걸 잘하는 편이에요.”

당시에도 그의 ‘안 아프게 맞는 법’론(論)이 몹시 인상적이었기에 그말을 소상하게 기억한다.

2020년의 허수는 작년보다 더 안 아프게 맞는 법을 알아온 듯하다. 대표적인 예가 ‘기민한 발놀림’ 룬을 선택하고 ‘사슬 후려치기(Q)’를 선 마스터하는 사일러스다. 이밖에도 그는 올해 카사딘, 갈리오, 아칼리, 세트, 에코 등의 근접 공격 챔피언으로 숱한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기발 사일러스’는 허수가 유행시킨 룬 빌드 중 하나다. 요즘, 적어도 소환사 협곡의 미드라인에선 ‘쇼메이커’가 GD고 이효리다. 허수가 솔로 랭크에서 특정 시간대에 귀환하면 곧 다른 미드라이너들도 그를 따라 귀환하기 시작한다. 그가 특정 룬과 아이템을 선택하고, 이를 활용해 솔로 랭크 1위를 수성하면 그 룬과 아이템 트리도 곧 유행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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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메 측정법

기자에겐 ‘쇼메 측정법’이 있다. 허수에게 특정 미드라이너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을 때 그의 얼굴이 확연히 밝아지고, 평가 선수 이름 뒤에 ‘형님’ 또는 ‘성님’이 붙는다면 그 선수는 세계 정상급 선수거나 곧 세계 정상급으로 성장할 선수다. 아마 허수는 이 측정법을 모를 것이다.

기자와 했던 인터뷰의 경우, 지난해 허수로부터 ‘형님’ 소리를 들은 건 단 세 명뿐이었다. 젠지 ‘비디디’ 곽보성(당시 KT 롤스터)과 인빅터스 게이밍(iG) ‘루키’ 송의진 그리고 TOP e스포츠(TES) ‘나이트’ 줘 딩이 그 주인공이다.

곽보성에 대해선 “비디디 형님은 진짜로 라인전에서 붙어보면 보이지 않는 ‘포스’가 있다”고 평가했고, 송의진에 대해선 “롤드컵에서 붙어보니 루키 형님은 실전도 연습만큼 공격적이더라”라며 혀를 내둘렀다. ‘띵구 성님’에 대해선 “예전부터 정말 잘하는 선수라고 생각했다”고 ‘2019 LoL 리프트 라이벌즈’ 개막에 앞서 밝혔다.

쇼메이커와 팀플레이

15일(한국시간), 담원 게이밍이 2020 롤드컵 8강전에서 DRX를 꺾고 4강에 진출했다. 경기 후 온라인으로 취재진 공동 인터뷰가 진행됐다. 기자는 지난해의 ‘쇼메이커’와 올해의 ‘쇼메이커’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질문했다.

허수는 지난해 롤드컵 우승자인 펀플러스 피닉스 ‘도인비’ 김태상과 자신을 대회 8강에서 탈락시킨 바 있는 G2 e스포츠 ‘캡스’ 라스무스 빈테르로부터 배우고 느낀 바가 있다고 답했다. 두 선수는 지난해 활발한 로밍으로 팀을 캐리했고, 가장 높은 곳에서 맞붙었다.

“작년에는 ‘내가 잘해서 내가 세진다. (그래서) 상대를 죽인다’였다면 올해는 ‘내가 잘해서 내가 세지면, 팀이 잘해서 팀이 세진다. (그러면) 적을 이긴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어요. 요즘엔 팀플레이에 능한 미드라이너들이 좋아요. 팀을 위해 (라인을) 선 푸시하고 돌아다니는 게 요즘 미드라이너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인 것 같습니다.”

지난해 허수를 상징하는 건 코르키로 대표되는 ‘성장 기대치가 높은 챔피언’이었다. 기대치는 팀원의 희생으로 충족되는 것이다. 메타의 영향이 크겠지만, 올해는 게임을 바라보는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자신의 희생으로 팀을 성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역할을 허수는 몹시 잘 해내고 있다.

담원의 무대 연출자는 이번 상하이 투어를 조기에 마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지난해 유럽 투어를 8강에서 조기 종연해야 했던 담원과 허수다. 1년 내내 학수고대했던 무대, 올해는 반드시 푸둥 스타디움에서 커튼콜까지 마치겠다는 각오다. 그런 허수와 담원, 그리고 LCK의 선전을 기원한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