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숭고한 희생 알리고 싶다”[인터뷰]

입력 2020-10-14 13:33
배우 민우혁의 모습. 라이브 제공

“진실을 진실로 알고, 진실 되게 행하는 자만이 진실 속에 영원히 머문다.” 이 대사를 읽는데 마음에서 파도가 일었다고 했다. 5·18민주화운동의 내막을 잘 몰랐던 자신이 부끄럽다고, 알고 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는 창작 뮤지컬 ‘광주’에서 편의대원 박한수를 연기한 배우 민우혁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민우혁은 12일 국민일보와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나 “숭고한 희생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며 “내내 먹먹했다. 커튼콜 때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박수 소리마저 묵직하게 들렸다”고 말했다. 민우혁은 2013년 뮤지컬 ‘젊음의 행진’으로 데뷔해 ‘벤허’ ‘아이다’ ‘안나 카레니나’ ‘지킬 앤 하이드’ 등 굵직한 작품에서 타이틀롤을 맡아 톱 뮤지컬 배우 반열에 올랐다. 최근에는 ‘복면가왕’ ‘불후의 명곡’에서 뛰어난 가창력과 쇼맨십으로 대중적인 스타로 입지를 다졌다.

창작 뮤지컬 ‘광주’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문화체육관광부와 광주광역시가 주최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 대중화·세계화 사업’ 일환으로 기획됐다. 극은 1980년 5월 1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의 계략은 이랬다.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 정권을 찬탈하자. ‘편의대’가 그 시작이었다. 시위대에 잠입해 폭력 시위를 조장하려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업무를 부여받은 그들은 모략을 일삼는다. 그 중심에 민우혁이 연기하는 박한수가 있다. 하지만 민주화를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고립된 광주, 그 안의 시민들. 가슴 아픈 역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뮤지컬 '광주'의 한 장면. 라이브 제공

중심에는 가장 보통의 시민들이 있고, 1980년대 민중의 뜨거운 삶이 담긴 ‘임을 위한 행진곡’이 그 뒤를 탄탄하게 받친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념 아래 치열하게 항쟁했던 광주 시민은 극 내내 금남로를 적신다. 민우혁은 “부끄럽지만 당시 사태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더 출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대본을 받고 편의대원이라는 존재를 처음 알았어요.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이들은 선량한 시민인 척 시위대에 잠복해 건강한 민주화 운동을 폭동으로 만들고자 해요. 아마 저처럼 이 사태에 대해 무지했던 대중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작품이 매우 가치 있다고 생각했고, 출연하게 된 계기가 됐죠.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잖아요.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불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말할 때는 제법 비장했다. “이 노래는 계속 귀에 맴돌아요. 어떤 날은 연습을 마치고 동료들과 ‘우리가 이 감정으로 금남로에 있었다면 목숨을 걸었을 것 같다’는 말을 나누기도 했어요.”

무대는 그날의 광활한 금남로를 그대로 재현했다. 투박하면서도 확장된 공간성이 부여된 무대에는 불의에 맞선 소시민들의 결기가 스며있다. 소박하지만 위대한 이야기를 재해석할 때 방점을 찍은 부분은 한 명의 위대한 리더십이 아닌,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을 살다 간 평범한 ‘우리들’이었다. “우리 공연의 주인공은 광주의 시민들, 그러니까 앙상블이죠. 사실 두 시간 반 동안 이 작은 무대에 담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잖아요. 시민의 이야기를 부각하고 개연성을 탄탄하게 잡으려면 누구보다 박한수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중심을 잘 잡아야 극이 지니는 메시지가 강조될 수 있을 거예요. 이제 저만 잘하면 돼요. (웃음)”

중심 인물은 민우혁이 연기하는 505부대 편의대원 박한수다. 극은 광주 시민의 열망에 감화돼 변화하는 그의 감정선을 따라 전개된다. 처음엔 ‘악마’였다. 시위대를 와해하려 분투하지만 윤이건과 문수경을 만나 이념의 변화와 마주하고, 몸을 내던져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한다.

뮤지컬 '광주'의 한 장면. 라이브 제공

다만 박한수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니, 관객 입장에서는 해석에 한계가 있었다. 계엄군과 대치 과정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투쟁하던 이들의 뼈아픈 이야기와 굳건한 신념의 서사는 건너뛰고, 어찌 보면 가해자로 해석할 수 있는 인물의 심리 변화에 집중하면서 본질을 비껴갔다는 지적이다. 민우혁은 일부 지적을 인정하면서도 앞으로의 ‘광주’를 기대해달라고 당부했다.

“모든 편의대가 다 박한수 같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을 전제했어요. 어떤 사람은 정말 악마였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박한수처럼) 억지로 악행을 저지른 걸 수도 있을 것 같았죠. 하지만 중요한 건 어찌 됐든 이들이 나쁜 짓을 했다는 거예요. 다만 박한수의 변화를 제가 잘 풀어낸다면 이 항쟁의 의미를 더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박한수는 억울하게 악마가 된 인간이었지만 그건 그의 사정이에요. 저는 박한수를 연기하면서 이 인물의 속내를 이해해달라고 호소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박한수가 결국 시민군 편이 되면서 목숨을 내던지지만 그 과정이 용서를 받기 위한 행동처럼,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행동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죠. 박한수의 피해의식을 최대한 배제한 거죠.”

그럼에도 아픈 역사가 주는 묵직한 메시지는 무대에 경건하게 담겼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5·18민주화운동 기간 내내 실제 가두방송에서 나온 말이다. 이런 창작 예술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대사기도 하다. 군중의 외침이 치솟을 때는 괴롭지만, 잊지 않아야 할 40년의 역사가 선명해진다. 민우혁은 “제대로 알고 나니 정말 알리고 싶었다”며 “한국판 ‘레미제라블’을 꿈꾼다”고 전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