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볼’ 주인공은 왜 야구장을 떠나려 할까

입력 2020-10-14 06:00
2011년작 영화 '머니볼' 포스터. 소니픽쳐스 제공.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혼자서는 할 수 없어. 노력해봤지만 왜인지 모르겠어(I don't know where to go, can't do it alone. I've tried. And I don't know why).

실화를 기반으로 한 2011년작 영화 ‘머니볼’의 마지막 장면. 감상에 젖은 채 도로 위를 달리는 빌리 빈(브래드 피트 분)의 승용차 안에 그의 어린 딸이 녹음한 팝송 ‘더 쇼(The Show)’가 흐른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영세 구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 빈이 전통의 대형구단 보스턴 레드삭스의 줄기찬 구애를 거절하기까지의 고뇌를 보여주는 씬이다.

빈은 비단 프로야구뿐만이 아니라 프로스포츠계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과학적 통계를 동원한 그의 구단 운영방식은 오클랜드가 소규모 재정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게 했다. 그가 몸담은 오클랜드는 올해도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에서 우승, 3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뤄냈다. 2000년부터 올해까지 총 11번이다. 이 기간 오클랜드가 거둔 정규리그 승수는 재정 면에서 비교 불가할 정도로 거대한 MLB 명문 뉴욕 양키스나 레드삭스보다 많다.

30여 년 동행의 결말

영화는 빈을 영입하려고 했던 레드삭스가 그의 구단 운영방식을 적용해 숙원이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뤄냈다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같은 시즌 정작 오클랜드는 지구 우승을 하고도 아메리칸리그 우승에 실패해 월드시리즈 진출이 좌절된다. 실제로도 오클랜드는 2006년을 마지막으로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에조차 진출하지 못했다.

미국 현지에는 최근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2일(현지시간) 관계자를 인용해 오클랜드 구단 부사장을 맡고 있는 빈이 야구계를 떠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과거부터 수십 년간 빈을 영입하려 구애해왔던 존 헨리 팬웨이 스포츠그룹 최고경영자(CEO)가 빈을 합류시키는 데 성공할 전망이라는 보도였다. 팬웨이는 레드삭스와 영국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구단 리버풀을 소유한 거대 스포츠 기업이다.

영화에서 묘사된 대로 빈과 오클랜드 구단과의 인연은 깊다. 고교 유망주 시절 1라운드에 지명될만한 재능으로 평가받았음에도 대학 진학이 예상돼 23라운드에서야 뒤늦게 뉴욕 메츠의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마이너리그에서부터 부진을 겪은 끝에 6년간 통산 162경기, 타율 0.219 홈런 3개의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1989년 오클랜드에서 선수복을 벗었다. 선수 은퇴 이듬해 오클랜드 구단의 스카우터로 새 경력을 시작한 빈은 3년 뒤 능력을 인정받아 구단 부단장으로 승격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오클랜드는 MLB에서 손꼽는 강호였다.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월드시리즈에 3연속 진출할 정도였다. 그러나 강력한 지원을 해주던 월터 A 하스 주니어 구단주가 1995년 사망하면서 새로 팀을 인수한 스테판 스콧과 켄 호프만은 구단 재정을 대폭 삭감했다. 1997년 10월 단장으로 승진한 빈은 어쩔 수 없이 실력보다 저평가된 선수들을 찾으려 애를 쓸 수밖에 없었다. ‘머니볼’의 신화 역시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이별의 조짐

사실 빈의 거취에 변화가 있을 것이란 예상은 처음이 아니다. 올여름 스포츠 분야의 첫 기업인수목적회사(SPAC)인 레드볼 액퀴지션 코퍼레이션을 만들면서 이미 다른 분야 진출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제기됐다. 이미 그는 2015시즌이 끝난 뒤 오랜 동료 데이비드 포스트에게 단장(GM) 자리를 넘긴 상태다. 팬웨이 스포츠그룹은 레드볼을 병합하면서 빈을 데려오려 한다. 다만 WSJ는 레드볼이 합병되더라도 빈이 레드삭스 운영에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최근 빈은 야구계 바깥 유럽축구에 눈길을 돌려왔다. 2017년 영국 잉글랜드 2부리그 챔피언십 구단 반슬리 인수를 시도한 컨소시움에 참여했다. 자신이 구단 고문을 맡고 있던 네덜란드 에레디비지 구단 AZ알크마르의 지분을 사들이기도 했다. 이번 소식을 둘러싸고 헨리 CEO의 팬웨이 스포츠그룹이 가지고 있는 EPL 구단 리버풀 운영에 참여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다만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없다.

최근까지도 빈은 오클랜드 구단의 공식 석상에 나섰다. 지난 9일 그는 포스트를 비롯해 밥 맬빈 감독과 함께 화상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WSJ에 따르면 빈은 검은 선글라스와 보이시주립대의 주황색 티셔츠를 입고 나와 선수단 재건에 관한 견해를 긴 시간 털어놨다. 그는 이 자리에서 “(선수단 재건은) 힘든 일이 될 것”이라면서 “하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겠다”라고 말했다. 때문에 구단을 떠날 것이라는 이번 소식은 다소 갑작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왜 하필 유럽축구?

빈이 유럽 축구계에 관심을 보이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머니’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야구단 운영을 하면서 샐러리캡이나 부유세 등 각종 조세 규제 때문에 더한 제약을 겪었지만 유럽 축구의 경우 상대적으로 이런 부담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오클랜드에서 지내는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던 재정적 제약이 적용되지 않기에 빈에게도 새로운 도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그가 야구에서 거둔 성공을 재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특히 프로축구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리그가 활성화되어 있는 터라 선수 스카우팅이나 이적 시장에서도 ‘값싸고 좋은’ 선수를 영입하는 게 최근 십수년 사이 무척 어려운 일이 됐기 때문이다. WSJ는 “두 스포츠계의 가장 큰 차이라면 축구계에서는 샐러리캡이나 사치세 등이 없어 이적시장 몸값도 높기에 이른바 ‘똑똑한 결정’이라 할지라도 무척 돈이 많이 들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빈 역시 분야를 바꾼다면 자신의 구단 운영 철학에 다소 변화를 줄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빈은 반슬리 인수에 참여했던 2017년 영국 런던에서 “스포츠에는 분명 돈을 많이 들인 좋은 결정이라는 게 있다”면서 “돈이 많다는 건 아주 좋은 결정을 할 기회를 얻는 것을 뜻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예전보다 부유한 구단에서 좋은 재정 지원 아래 일해볼 구상을 밝힌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