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본의 태평양전쟁을 수행한 부평 조병창이 18년만에 개방되면서 시민들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한반도를 전쟁의 지옥으로 몰아넣은 일제는 81년전인 1941년 5월 부평에 ‘인천육군조병창’을 열었다.
인천도시역사관 관계자는 조병창 끝나지 않은 역사 전시회와 관련, 13일 “인천육군조병창의 역사는 일재 패망시 문서 소각으로 잊혀졌고, 곧이어 들선 미군기지에 다시 한번 묻혔다”며 “오는 11월1일까지 계속되는 전시회는 남아있는 유물과 사람들의 기억을 실마리로 해 인천조병창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자들은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제는 중국 전선에서 사용할 무기를 공급할 적지로 인천을 생각하게 됐고, 일본 본토가 아닌 인천에 조병창이 들어선다는 것은 그만큼 전황이 급박해졌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해석한다.
연주자들은 “당시 일본은 수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과 전면전을 치르고 있었고, 미국과도 관계가 악화일로여서 일본 본토는 물론이고 오키나와, 식민지 조선, 만주국의 인력과 물자를 모두 동원해도 항시 부족한 상황이었다”면서 “조선에서 노동력 부족은 최종적으로 1944년 국민징용령 시행으로 해결했다”고 설명했다.
연주자들은 또 “조선에 있던 동상이나 구리가 들어간 유물이 이떼 조병창의 용광로로 들어갔는데, 정확한 규모와 현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 언급했다.
주한미군사는 “1945년 9월 16일 본부, 제24군수지원사령부, 많은 주요 예하부대들이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서 멀지 않은 기존의 일본군 조병창 근처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평 조병창 기지가 미8군의 주요부대 주둔지로 변모한 순간이었다.
이 캠프마켓 부지가 81년만에 인천시민의 품으로 동아오게 된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상황이지만 81년만에 개방된 우리 땅에 발을 디뎌보려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14일 하루종일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인천=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