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가을 이사철을 맞아 우려됐던 전셋값 상승과 매물 실종이 현실화되고 있다. ‘계약갱신청구권 카드’를 사용한 이들은 안도했지만, 집주인의 실거주나 거주지 이전 등으로 새로운 전셋집을 구해야 하는 이들은 ‘가을 패닉’ 속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박윤태(가명·47)씨는 지난 8월부터 토요일 아침이면 어김 없이 22개월 된 아기를 깨워 경기 화성에 있는 처가에 맡기고 경기 안양 일대 전세 매물을 찾아다니는 것이 일상이 됐다. 내년 2월 전세계약 종료를 앞두고 전셋집을 새로 구해야 하는데 아이를 안고 낯선 동네를 돌아다닐 수 없어서다.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박씨는 첫 아이가 더 크기 전에 직장과 더 가까우면서도 서울보다 자연환경이 좀 더 쾌적해 아이를 키우기 편한 30평형대 아파트를 찾기로 했다. 하지만 전세 유랑이 시작된 지 두 달이 넘었음에도 박씨는 최소한의 조건에 맞는 집을 고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건에 맞는 집은커녕 시중에 나온 전세 매물 자체가 속속 사라져버렸다.
하루는 대기를 걸어놓았던 한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4억5000만원짜리 전세매물이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현재 거주 중인 아파트의 전세가 4억원 정도에 견줄 만한 금액이어서 기쁜 마음에 매물을 보기 위해 서둘러 이동했지만 공인중개사는 다시 전화로 “집주인이 보증금을 2000만원 올려달라고 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기분이 나빠져 그냥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음날 전화해보니 5000만원 오른 5억원에 계약이 됐다더라”며 혀를 내둘렀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30대 워킹맘 심은진(가명·여)씨는 추석 연휴 이후로 회사에 출근해도 일에 집중을 못하고 있다. 업무시간에도 틈이 날 때마다 포털사이트와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앱)에 올라오는 전세 매물을 확인하고, 일주일에 몇번씩 동네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전화를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퇴근길에는 열려 있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들러 인사하고 집에 들어가는 게 일과가 됐다. 혹시라도 급매물이 나올 경우 포털이나 앱에 올리기 전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줄까 하는 마음에서다.
집주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심씨는 내년 초 당연히 재계약이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심씨는 최근 전세 시세를 고려해 계약갱신청구권을 쓰지 않고 전세보증금을 20% 정도 올려줄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추석 직전 집주인이 “아무래도 내가 실거주를 해야 할 것 같아 재계약이 어렵겠다. 미안하게 됐다”고 통보하자 넋이 나갔다. 급하게 매물을 찾고 있지만, 기존 전세금으로는 비슷한 조건의 아파트를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전셋값이 올랐기 때문이다. 심씨는 지난해 초 4억원 정도에 전세를 들어왔는데, 며칠 전 심씨가 사는 아파트의 같은 평형의 전세계약이 7억원에 이뤄졌다.
하지만 이런 전세 매물조차도 거의 없다는 게 문제다. 심씨가 방문한 동네의 한 공인중개사는 지난 11일 “지금은 집을 보고 전세 계약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며 “매물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일단 계약금부터 쏘고 온다고 생각하시라”고 귀띔했다. 이 공인중개사는 “융자 없는 물건은 지금 국면에서는 일단 잡지 않으면 전세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특히 초등학교와 가까운 아파트 단지일수록 더 구하기 힘들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직장 때문에 오랜기간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정재규(44)씨는 가족이 다시 함께 살림을 합치려던 꿈을 전세난 때문에 포기할 위기에 처했다. 큰아들이 야구를 하기 위해 서울 은평구의 한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을 계기로 근처에 4인 가족이 함께 살 만한 30평형대 아파트를 구하고 있지만 매물이 없다. 내년 1월까지 아파트를 구하지 못하면 아내와 아들은 학교 인근 오피스텔에서 지내고, 정씨는 다른 거처에 머물게 될 수도 있다. 내년 1월 새로운 전셋집으로 이사를 예상하고 경기도에 보유하던 아파트도 처분해 달리 거처가 없는 상황이다.
설령 전세매물이 나온다 해도 턱밑까지 차오른 전세보증금을 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박씨는 애초 보유자금 4억원에 1억원 정도 대출받으려고 각오했지만, 접근성·주변환경·아파트 등 조건을 다 지키려면 최소 6억원 이상이 있어야 할 판이다. 정씨는 “지난 5월엔 입주를 알아보던 지역 30평형대 아파트 보증금이 5억5000만원 안팎이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전체 3000여가구 아파트 단지에서 나온 전세 매물은 하나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호가가 7억원이 넘었다”고 전했다.
실제 서울의 전세매물은 올가을 극적으로 감소했다. 부동산 빅데이터 업체 ‘아실’에 따르면 지난 8월 1일 온라인에 집계된 서울 아파트 전세매물은 3만7107건이었다. ‘허위매물 과태료법’(공인중개사법 개정안)이 시행된 같은 달 21일 매물은 2만1090건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고, 이후 계속 줄어들어 지난달 19일에는 1만건 이하로 감소했다. 이후로는 8000~9000건대를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이처럼 전세에 치열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에게 월세가 대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씨는 “현재 봐둔 은평구의 한 아파트 반전세 시세는 ‘보증금 2억원에 월세 100만원’ ‘1억원에 150만원’ 같은 식으로 형성돼 있다”며 “전세자금 대출 1억원을 받아서 들어가면 한 달 이자비용이 30만원도 안 드는데, 여기에 월세 살면 한 달에 100만원 정도 현금이 더 들어가는 셈”이라고 했다. 이미 아들 운동 지원에 매달 200만원 가까이 부담하고 있는 정씨로서는 월세 추가 부담은 택하기 어려운 선택지다.
‘임대차 3법’이 통과되면서 기존 전세입자의 권리는 보장됐지만, 새로 집을 구해야 하는 임대인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 정씨는 “어쨌든 기존 전셋집이 빠져야 서로서로 로테이션이 되고 이사도 가능하게 되는 건데 기존 세입자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으니 새로 들어가 살아야하는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다”며 “이러니 전셋값이 오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물론 집 크기를 줄이거나 지금보다 더 외곽으로 이동하면 집을 구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전셋집을 구해야 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이 세운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강제로 포기하라는 얘기와 마찬가지다.
심씨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는 우리 아이가 지금의 초등학교에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동네 단지 중에 가장 싼 아파트”라며 “지금 단지 내에서 전세를 새로 구하지 못하면 아이 전학을 무릅쓰고 이사하거나, 매일 차로 아이를 등하교 시켜야 하는데 둘 다 녹록치 않은 상황”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김지애 정우진 강보현 기자 am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