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노동당 창건 75주년 당일인 10일 0시를 기해 열린 열병식에서 미국을 직접 겨냥한 도발적 발언은 자제하면서도 외부 위협에 맞서 자위적인 전쟁억제력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남측을 향해선 미국과의 협상에 일정 역할을 해줄 것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사상 첫 심야시간 열병식을 개최한 김 위원장은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이례적인 ‘쇼맨십’을 보이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30분가량 분량의 연설에서 “적대세력들의 위협적 행동들을 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자위적 방위수단으로서 전쟁억제력을 계속 강화해 나갈 것”이라며 “남용되거나 선제적으로 쓰이지는 않겠지만, 만약 어떤 세력이든 우리를 겨냥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든다면 가장 강력한 공격적인 힘을 총동원해 응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 대선에서 트럼프 공화당 행정부가 재집권하든,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서든 미국이 대북 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는 한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과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다만 연설에서 미국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 등 수위는 조절했다.
남측을 향해서는 유화적인 메시지를 내놨다. 그는 “사랑하는 남녘의 동포들에게 따뜻한 이 마음을 정히 보내며 하루빨리 보건 위기가 극복되고 북과 남이 다시 두손을 마주 잡는 날이 찾아오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향후 남측 역할을 기대하며 남북 관계를 관리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김 위원장 연설을 보면 일단 북한은 11월 미국 대선 이전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같은 고강도 도발을 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과거와는 다른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달라는 주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11일 “향후 비핵화 협상에서 미국이 북한의 생존권과 발전권을 보장하는 방안을 제시하라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열병식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북한은 통상적으로 오전에 열병식을 개최해 왔지만, 이번에는 10일 0시부터 2시간16분가량 진행했다.
김 위원장은 10일 0시 정각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즐겨입던 회색 정장 차림으로 주석단에 등장했다. 김 위원장의 양 옆에는 최근 파격적인 북한군 원수 칭호를 받은 리병철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박정천 총참모장이 섰다. 이들은 공식서열2위인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보다 가까이 김 위원장을 보위했다.
김 위원장은 원고지 44매 분량의 연설문 읽어 내려가면서 연신 주민들에게 “미안하다” “고맙다”고 말했다. 수도당원사단의 태풍 피해 복구 노력을 소개할 때는 아예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공개석상에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인 것 사상 초유의 일이다.
열병식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부대는 ‘김일성 시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황토색 군복의 항일 빨치산 부대였다. 이어 초대형 방사포와 북한판 에이태킴스 등이 속속 등장했다. 행사에는 드론, LED 등이 동원됐고 불꽃놀이도 이어졌다.
이번 열병식은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작품’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김 제1부부장은 과거 미측에 독립기념일 DVD를 요청한 적이 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 행사를 따라 심야 이벤트를 기획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 제1부부장의 감독 아래 현송월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등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