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는 폭탄을 맞은 도시 같지 않았다. 그곳은 거대한 증기 롤러가 지나가 짜부라뜨려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 듯했다.…이곳은 맹공을 당한 태평양의 섬을 에덴동산처럼 보이게 만든다.”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를 찾은 윌프레드 버체트가 쓴 기사 ‘원자병(The Atomic Plague)’의 일부다. 그는 일본이 전함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사인한 1945년 9월 2일 홀로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30시간 넘게 이동했다. 다른 기자들이 항복 조인식을 취재하고 있을 때 외국 기자로는 처음으로 피폭된 도시에 들어갔다.
9월 5일 런던 ‘데일리 익스프레스’를 통해 기사가 나가자 맥아더 사령부는 버체트의 미디어등록을 취소하고 일본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의 카메라도 압수했다. 9월 6일엔 다른 피폭 도시 나가사키를 취재한 ‘시카고 데일리 뉴스’ 기자의 기사를 검열해 활자화되지 못하게 했다. 맥아더 사령부와 미국 정부는 원자폭탄과 방사선으로 인한 피해가 드러나는 것을 꺼려 관련 정보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카운트다운 1945’는 투하 이후에도 그 피해 사실을 비밀에 부쳐야 했던 첫 원자폭탄에 관련된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하루아침에 총사령관이 된 대통령, 자신이 끔찍한 무기 제조에 참여한다는 것조차 몰랐던 10대 소녀, 폭탄 투하 전날 히로시마 집으로 돌아온 열 살 소녀 등 원자폭탄을 둘러싼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사망으로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이 된 1945년 4월 12일부터 히로시마에서 ‘리틀보이(꼬마)’가 폭발한 8월 6일 오전 8시 15분까지 116일간의 여정을 다양한 인물의 관점으로 풀어낸다.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맨해튼 계획’은 1945년 4월 기준 미국 전역에서 12만5000명이 관여하고 있었지만 그 전모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트루먼은 대통령 취임 13일 후 군사부장관 헨리 스팀슨이 보고했을 때 “이렇게 방대하고 돈이 많이 들며 나라 곳곳에 시설을 두고 있는 사업”이 비밀을 유지하는 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폭탄의 위력 때문이었다. “대통령은 자신이 알게 된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스팀슨의 경고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이 폭탄이 ‘너무도 강력해서 결국 온 세계를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이 투입된 계획임에도 성공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일본을 상대로 투하하지 말고, 비군사적 실연(實演)을 통해 항복을 받아내자는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에는 실패에 대한 부담도 크게 작용했다. 스팀슨은 “경고나 실연 후에 ‘불발탄’이 되는 것보다 더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었을 것”이라고 당시를 돌이켰다. ‘올림픽’이라는 작전명이 붙은 일본 규슈 침공 계획을 같이 준비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원자폭탄에 대한 인물들의 입장 차이 역시 흥미로운 지점이다. 원자폭탄의 초기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실라르드 레오를 포함한 일군의 과학자들은 무기 사용에 반대했다. “군사적 사용 외에 대안이 없다”고 봤던 과학 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투하 이후 입장이 달라졌다. 1956년 6월 그는 히로시마 폭격이 “비극적인 잘못”이라고 후회했다. 과학자들과 달리 트루먼 대통령,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했던 B-29 승무원들은 그들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입장을 죽을 때까지 견지했다.
등장인물 중 평범한 이들의 사연은 과학자, 정치인, 군인과는 다른 스산함을 안긴다. 무엇을 만드는지 모른 채 제조 과정에 참여했던 루스 시슨의 원자폭탄 투하 당일 심경에는 분노가 서려 있다. “루스는 이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데 참여한 것이었다. 분노와 배신감이 느껴졌다. 저들은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그렇게 무서운 무기를 만드는 일을 하게 했다. 이제 자신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 의무병으로 참전했던 루스의 남편은 전쟁이 끝난 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는다. 히로시마에서 어머니를 잃은 다무라 히데코의 이야기도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남긴 수많은 비극 중 하나다. 히데코는 폭탄 투하 전날 시골에서 “집으로 가자”고 어머니를 조르지만 않았어도 어머니와 친구를 잃지 않았을 거라는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려야 했다.
책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굵직한 역사적 사실 사이사이를 낯선 인물들의 이야기로 채운다. 익숙한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지루하지 않다. 폭스뉴스 앵커이자 지난달 28일 미국 대선 첫 TV 토론을 진행한 크리스 월리스가 저자 중 한 명인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첫 원자폭탄에 따른 피해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싶은 독자라면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1945 히로시마’를 함께 읽어도 좋을 듯하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