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을 연출한 이경미 감독은 작품을 한 마디로 이렇게 정의했다. ‘완성되지 않은 여전사가 비로소 본인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이야기’. 극적인 서사를 위해 드라마 속 은영(정유미)은 동명의 원작 소설 속 은영과 달라야 했다. “소설 속 은영은 성숙하고, 드라마 속 은영은 츤데레 같아요. 은영의 성장 드라마로 각색하려면 성숙한 은영보다 차가워 보이지만 속이 깊은 캐릭터가 유용하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궁극적으로 젤리 퇴치라는 목적을 행할 때는 두 은영의 모습이 같아요.”
이 감독은 최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보건교사 안은영’은 미완의 은영이 어른이자 히어로로 성장하는 드라마”라며 “은영이 물리쳐야 하는 대상인 젤리가 작품에서 지니는 상징성이 커 은영의 서사와 함께 젤리 표현에도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정세랑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고등학교 보건교사 은영이 욕망의 잔여물인 젤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이용해 학생들을 구하는 코믹 히어로물이다. 작품 속 세계관에서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은 젤리를 만들고, 오염된 젤리에 현혹된 이는 불행에 빠진다. 이 작품은 공개 직후부터 넷플릭스 상위권에 안착하면서 전 세계에 K드라마의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은영은 한국 콘텐츠 속 기존 여성 캐릭터와는 다르지만, 여느 히어로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는 인물도 아니다. 누군가를 구해야 하는 운명을 귀찮아하지만 막상 오염된 젤리가 나타나면 무지개칼과 비비탄총을 망설임 없이 꺼내 든다.
은영의 성장기를 풍성하게 표현하기 위해 오브제에도 여러 의미를 녹였다. 이 감독은 은영을 ‘완성돼 가는 여전사’로 설정하면서 젤리를 무찌를 때 사용하는 무지개칼과 비비탄총에 메소포타미아 여신의 별과 아테나의 날개 등 신화 속 여전사의 상징을 더했다.
의상도 신경 썼다. 은영은 주로 터틀넥을 입는다. 젤리 때문에 생긴 흉터를 가린다는 설정에서 시작됐다. 이 감독은 “은영은 젤리를 공격할 때 상처를 입는 인물이라 싸울 때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비닐 소재의 보건교사 가운은 은영을 보호할 수 있는 갑옷이다. 언제든 달릴 수 있도록 발이 편한 운동화도 전쟁터를 누비는 은영의 일상을 반영했다.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은 젤리다. 젤리는 생각과 욕망의 잔여물인데, 달팽이가 지나가면 점액질이 남는 것처럼 생명체의 욕망이 지나고 난 자리에 남아있는 물질을 보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까 하는 정 작가의 상상에서 출발했다. 앞서 그는 제작발표회에서 “욕망만큼 순수하면서도 오염되기 쉬운 게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실에 실존하지 않는 젤리를 어떻게 영상화할지 관심이 집중됐는데, 이 감독은 치열한 연구 끝에 합격점을 얻어냈다. 1953년 조셉 페인 브레넌의 소설에서 최초로 등장한 슬라임부터 ‘포켓몬스터’의 메타몽까지 슬라임 계보를 정리하는 게 먼저였다. 이어 물이끼, 나무 수액 등 생물의 특징을 연구하면서 젤리의 큰 방향성을 잡은 후 움직임과 모양새를 구체화했다. 새로운 규칙도 만들었다. 이 감독은 “무해한 젤리는 투명하게 표현했고, 오염된 젤리는 불투명하면서 위험한 동식물처럼 화려한 색을 입혔다”며 “젤리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서 ‘우리의 젤리는 어떨까’하며 역추적했다”고 설명했다.
“젤리는 은영이 싸워야 할 적수 중 하나인데, 소설이 가진 말랑말랑한 톤을 젤리의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젤리를 문어, 고래, 두꺼비 등으로 캐릭터화해서 에피소드마다 은영이가 무찔러야 할 장애물로 소개했어요. 일단 경계심을 가질 존재로 보이게 하면서도 귀엽고 말캉말캉한 물성을 더했죠. 귀여운데 기괴한, 색은 알록달록한데 만지기 싫은, 양극의 감정을 가져갈 수 있는 모양으로 구체화했어요.”
곳곳에 세계화를 위한 노력도 돋보인다. ‘보건교사 안은영’에 유독 신인 배우가 많이 출연하는 이유 역시 기존의 한류 드라마에서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얼굴을 알리고 싶다는 취지였다.
‘한국스러움’의 유기적 결합도 화제다. 이 감독은 “원작에 이국적인 판타지 요소와 한국적인 소재가 이미 잘 어우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명승지 사찰이나 남산타워의 자물쇠 등에서 인간의 소원을 흡수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은영의 모습을 원작에서 가져오고,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느라 사시사철 봉숭아 화분을 키우는 은영의 집, 동네 할머니들로 북적거리는 화수(문소리)의 침술원 등 토속적인 디테일을 추가했다. 이 감독은 “한국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음악적으로는 민요와 판소리 등을 접목한 사운드를 선택했다.
넷플릭스를 만난 건 신의 한 수였다. 이 감독은 “넷플릭스는 다채로운 표현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독보적인 플랫폼”이라며 “특히 장벽이 낮아 무척 즐거웠다. 극장 상업영화였다면 시도하지 못했을 지점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시즌2를 묻는 말에는 “넷플릭스가 결정할 일”이라면서도 “시즌2가 나온다면, 연출을 누가 하든 밑밥을 잘 깔아놔야겠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만들었다”고 말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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