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미 감독은 20년 동안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의 이력에 장편 상업영화는 두 편뿐이다. ‘미쓰 홍당무’(2008)와 ‘비밀은 없다’(2016). 하지만 ‘이경미 월드’를 구축하기엔 충분했다. 그의 세계관은 당연한데 특별하다.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고 주체적이다. 독특한 미장센으로 예측불가능한 서사를 구현하는 이 감독이 처음으로 드라마에 도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긴 호흡에서는 그의 세계관이 어떻게 구현될지 주목됐다. 지난달 25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6부작)이 그 결과물이다.
이 감독은 최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보건교사 안은영’은 ‘이경미 세계관’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며 “지금까지는 없었던 여성 히어로물의 프리퀄(전사를 담은 속편) 형식으로 시즌1을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이경미 월드’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 같냐는 질문에는 이런 답을 내놨다. “아마도 말 안 듣는 여자주인공을 내세운 예상할 수 없는 전개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작품을 만들면서 ‘이래야 된다’고 정해진 규칙을 깨고 줄곧 딴짓을 해왔죠.(웃음) 그게 저만의 특징이라면 특징인 거죠.”
은영(정유미)은 드라마 초반에 이런 말로 자신을 소개한다. “내가 보는 세상은 비밀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XX” 시작부터 파격적이다. 이 감독은 특히 이 대사를 곱씹으며 “가장 이경미의 색깔을 잘 나타낸 장면이 아닌가 싶다”고 전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정세랑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고등학교 보건교사 은영이 욕망의 잔여물인 젤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이용해 학생들을 구하는 코믹 히어로물이다. 작품 속 세계관에서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은 젤리를 만들고, 오염된 젤리에 현혹된 이는 불행에 빠진다. 이 작품은 공개 직후부터 넷플릭스 상위권에 안착하면서 전 세계에 K드라마의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은영은 한국 콘텐츠 속 기존 여성 캐릭터와는 다르지만, 여느 히어로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는 인물도 아니다. 누군가를 구해야 하는 운명을 귀찮아하지만 막상 오염된 젤리가 나타나면 무지개칼과 비비탄총을 망설임 없이 꺼내 든다. 이 감독은 “완성되지 않은 여전사가 비로소 본인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여기에 정 작가가 창조했던 ‘선한 어른들이 아무 대가 없이 학생들을 지키는 이야기’라는 넓은 주제가 더해지니 의미는 깊어졌다.
당초 이 감독은 전 세계에 작품을 공개하고, 자유로운 작업 환경을 보장해준다는 이점을 활용하기 위해 넷플릭스와 작품 제작을 논의 중이었다. 그러던 중 ‘보건교사 안은영’의 연출을 제안받았다. 소설을 읽는 순간부터 그의 머릿속에서 시각화가 시작됐다.
‘영상으로 만들면 정말 많은 시도를 할 수 있겠다’. 드라마로 탄생할 은영의 성장기를 떠올리니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특히 은영의 캐릭터를 ‘여성 히어로’로 구축하는 작업이 먼저였다. 이 감독은 “옴니버스로 구성된 소설 속 여러 재료를 활용해 여성 히어로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은영은 용감함과 당돌함을 고루 지닌 인물로, 한국 콘텐츠에서는 드물었던 강력한 여성 캐릭터다. 주체적인 은영은 작품 속 여성 서사의 전환점이 될 예정이다.
확고한 ‘이경미 월드’에 정 작가의 뚜렷한 세계관이 만나다 보니 혹자는 너무 강한 두 세계가 타협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추측을 했다. 이 감독은 “절충과 설득 과정에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이 감독이 만들어낸 작품 중 가장 독특한 작품으로 꼽히는 ‘보건교사 안은영’은 정 작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감독은 “정 작가의 작품을 상상할 기회가 주어진 건 행운”이라며 “혼자서는 절대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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