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연습하며 만든 ‘찰리’… 이석훈의 킹키부츠란[인터뷰]

입력 2020-10-06 05:00
가수 겸 배우 이석훈의 모습. C9엔터테인먼트 제공

무대에 꼿꼿이 서 있는 레드 힐은 찰리의 공장에서 탄생한 ‘킹키부츠’다. 인생을 바꾼 기적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 ‘킹키부츠’는 사회의 편견과 억압을 기분 좋게 쳐낸 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자 황홀한 음악과 함께 내면의 파동을 자아내는 위로다. 중심에는 찰리가 있다. 이 작품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지만 롤라를 만난 후 중심을 잡아가는 신발 공장 사장 찰리의 성장기다.

찰리를 연기하는 가수 겸 배우 이석훈은 최근 국민일보와 서울시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나 “찰리의 인생을 바꾼 건 롤라이고 킹키부츠는 그 매개”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이 막 오른 뒤 “이석훈 연기가 물 올랐다”는 반응이 나왔다. 찰리는 아버지의 공장을 이어받아 모두를 아우르며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평면적인 캐릭터가 결코 아니다. 이석훈은 빠르게 쏟아내는 대사 속에 레드 힐을 만들 때의 흥분과, 현실의 벽 앞에 무너져 느낀 좌절감, 롤라와의 대치 상태에서 오는 분노의 감정이 뒤섞인 입체적인 캐릭터를 훌륭히 완성해냈다.

2008년 SG워너비로 데뷔해 정상을 찍은 그는 2018년 ‘킹키부츠’의 찰리 역으로 뮤지컬에 데뷔했다. 2년 뒤인 지금 찰리와 다시 만난 그에게 “힐 신고 춤추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묻자 “안 그래도 인터뷰 오기 전 발 마사지를 하고 왔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킹키부츠를 신고 휘청거리는 장면을 언급하자 “사실은 킹키부츠를 신고 뛰어다니기도 한다”며 “어정쩡하게 걷는 것도 연기”라는 답이 돌아왔다.

'킹키부츠'에서 찰리 역을 맡은 이석훈의 모습. 로네뜨 제공

‘킹키부츠’는 1979년 영국 노샘프턴의 신발 공장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2014년 초연했고, 올해 4번째 시즌이다. 찰리는 정통 수제화를 만드는 공장을 물려받아 경영하는데, 지속한 경기 침체로 저렴한 신사화가 대량 수입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틈새시장을 찾던 찰리의 눈에 롤라의 신발이 들어온다. 남성도 신을 수 있으면서 허벅지까지 오는 80㎝의 부츠. 남성의 체중을 감당할 수 있는 튼튼한 굽을 가진 신발. 롤라는 찰리의 공장의 디자이너가 됐고 둘의 팀워크는 붕괴 직전의 공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킹키부츠에 사활을 건 찰리의 아집 탓에 공장 직원과 불화가 터지기도 했고, 드래그 퀸이 무대에 오르면 좋겠다는 롤라의 제안에 찰리가 비수 꽂힌 말을 쏟아내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 결과는 대성공. 서로서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마주할 수 있던 수확이었다. 극의 메시지는 여기에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니,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을 지닌 이석훈표 찰리는 압권이었다. 가수 출신 뮤지컬 배우라는 선입견 속에서도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내려놓는 게 핵심이었어요. 표현하는 것보다 절제하는 게 더 어려웠죠. 찰리는 튀어도 안 되고, 안 튀어도 안 돼요. 적정선을 유지하며 감정을 조절해야 했어요. 사실 애드립으로 한없이 웃길 자신이 있는데(웃음), 여러모로 자제해야 하고 몸짓도 일부러 어색하거나 어수룩하게 표현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게 핵심이었고, 그래야 극의 메시지가 더 잘 전달될 거라고 생각했죠.”

더 극적으로 연기할 수도 있었지만 최대한 힘을 뺀 이유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이석훈은 “한국에서 이미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공연이라 마니아층이 탄탄해 관객 대부분 공연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며 “찰리 캐릭터를 나보다 더 잘 아는 분들”이라고 답했다.

'킹키부츠'에서 찰리 역을 맡은 이석훈의 모습. 로네뜨 제공

2018년의 찰리와 지금의 찰리는 다르다. 그 사이 뮤지컬 ‘웃는 남자’ ‘광화문 연가’의 타이틀롤을 맡으면서 시각이 넓어진 덕분이다. 작품 해석력은 깊어졌고, 연기는 원숙해졌다. “뮤지컬을 시작한 2018년 찰리를 만났어요. 뮤지컬 데뷔작이라 캐릭터 분석에 공을 들였죠. 당시만 해도 그게 다 인줄 알았어요. 완벽했다고 자만한 거죠. 그리고 올해 다시 찰리를 만났어요. 다시 대본을 읽는데, 제가 끄집어내지 못한 지점이 정말 많더라고요(웃음). 그때의 저는 찰리의 보이는 부분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더 밀도 있게 연기하고 있어요.”

찰리에 대한 이석훈의 애정은 남달랐다. “300회 공연을 봤다”고 말하니 잠시 생각하다 이내 “아, 그날은 한 번도 안 틀린 날이에요”라는 답이 나왔다. “공연을 회차별로 다 기억하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계에서 완벽주의자로 소문난 이석훈은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독한 연습 벌레가 됐다. “이 부분은 어땠어요?” “이 대사 감정은 어땠어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묻는다. 그게 빠른 성장의 동력이 됐다.

이석훈이 ‘킹키부츠’를 특히 사랑하는 이유는 뮤지컬 작품 중에서도 유독 개연성이 뛰어나서다. 감정은 매 장면 미묘하게 달라진다. 극적으로 화를 분출했다가 다시 삼켜야 하는 순간이 번갈아 등장한다. 그래서 더 힘들지만, 그게 또 에너지를 준다.

“이 정도로 서사가 좋은 건 드물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1막을 더 공들여요. 절정에 치닫는 2막을 강조하려면 서사를 잘 다져놔야 하기 때문이죠. 찰리의 개인적인 서사를 들여다보자면 약혼자와의 갈등 장면이 감정 소모가 가장 컸어요. 약혼자가 처음에는 ‘리처드 사장님’이라고 불렀다가 어느 순간 ‘리처드’라고 말해요. 찰리는 이때 눈치를 채죠. 아, 둘 사이에 부적절한 무언가가 있구나. 그 화는 롤라에게 향해요. 사회 부적응자라고, 모진 말을 쏟아내죠. 그 당시 찰리는 이성을 잃은 상태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호흡을 빠르게 가져갔어요. 생각 없이 쏟아내는 말들이라, 생각할 시간 없이 뱉어낸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객석은 듬성듬성 찬다. “아쉽지 않냐”고 물으니 손사래 쳤다. “전혀요.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이렇게 열정적으로 연기했던 순간이 있었나 싶어요. 배우들끼리 ‘정말 관객들이 오셨다고? 진짜로?’이런 대화를 나눈 적도 있어요. 공연을 보러 와달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사실 언제 막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늘 마지막 공연이라고 생각하면서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킹키부츠’를 본다면 관객 여러분의 인생도 달라져 있을 거라는 점이에요.”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