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가 외국 지도의 동해, 일본해 병기 현황을 ‘3급 비밀’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5일 파악됐다. 외교부는 이를 근거로 정확한 동해 병기 비율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현황을 먼저 공개할 경우 일본 정부에 대응의 빌미를 제공하는 등 외교적으로 불리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하지만 정부가 국민 정서상 민감한 논란 자체를 만들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저자세로 임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외교부는 2009년 이후로 외국 지도의 동해 병기 현황 조사 결과를 모두 3급 비밀로 지정하고 있다. 3급 비밀로 지정되기 직전 외교부가 공개한 동해 병기 비율은 28.07%(2009년)였다. 외교가에서는 최근 동해 병기 비율이 약 40%대까지 향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외교부는 동해 병기 현황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공개될 경우 거꾸로 일본 정부에 이용당하는 등 외교적 역효과를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공식 조사 결과 동해 병기 비율이 50%에 미치지 못하면 일본해 단독 표기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을 설득하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도 깔려 있다고 한다.
반면 이런 미온적인 대응이 문제를 더욱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일본 정부도 자체적으로 파악한 현황 등을 토대로 외국 국가들을 설득할 텐데, 굳이 현황을 비공개해 얻을 실익이 없다는 얘기다. 국민 정서상 민감한 내용이어서 외교부가 굳이 공개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실제로 외교부 내부에서도 “이제 관련 현황을 공개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동해 병기 문제에 대응해야 할 때가 됐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작 3급 비밀로 지정된 이후에 일본해 단독 표기로 후퇴한 사례도 있다. 2008년 동해 병기 방침을 밝혔던 불가리아는 일본 정부의 지속적인 항의를 받았고, 결국 2016년 불가리아 지도제작청은 자국 지도 제작사들에게 일본해로 단독 표기할 것으로 권고했다. 앞서 2004년 일본해 단독 표기로 후퇴한 프랑스 정부도 여전히 일본해 단독 표기 방침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는 “동해 병기에서 일본해 단독 표기로 번복하는 경우 해당국 주재 재외공관장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항의하고 수정 요청을 하고 있다”면서도 “사후 조치 등 자세한 결과는 공개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한편 국제수로기구(IHO)는 오는 11월 총회를 열어 동해나 일본해와 같은 지명 대신 숫자(식별번호)로 바다 이름을 표기하는 방안의 표준해도집 개정안을 의결할 예정이다. 일본 정부가 일본해 단독 표기의 근거로 삼았던 내용이 사라지는 셈인데, 아직까지 일본 정부도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각국 지도 제작사들의 참고 사항에 그치기 때문에, 개정 이후 각국 지도 제작사들이 이를 실제 어떻게 반영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전 의원은 “표준해도집이 개정된 이후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한일간의 외교전이 더욱 치열해질 수 있다”며 “외교부가 관련 현황을 공유하고 알려서 더욱 철저한 대응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