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 소박맞은 여인 아닌 남편 지원으로 섬 사역 일궈

입력 2020-10-04 14:45 수정 2020-10-04 16:20
문준경 전도사는 한국교회가 자랑스러워하는 순교자 중 한 명이다.

5일은 ‘섬 선교의 어머니’로 불리는 문준경(1891~1950) 전도사가 순교한 지 70년이 된 날이다. 문 전도사는 한국교회가 자랑스러워하는 순교자 중 한 명이다. 1927년 회심한 뒤 전남 신안을 중심으로 다도해의 섬들을 돌면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중동리·대초리·방축리 교회 등을 설립했다. 50년 10월 증동리교회 근처 바닷가에서 공산당원들에 의해 순교했다.

문 전도사가 설립한 교회들.

그의 일대기는 85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에서 출간한 책 ‘섬마을의 순교자’를 시작으로 이현갑 목사의 책 ‘순교자 문준경’을 통해 알려졌다. 한국교회가 그를 기억하게 된 계기는 2000년대 후반이다. 문 전도사를 조명한 책과 영상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문 전도사는 한국교회의 순교 유산으로 자리매김했다.

문준경 전도사의 남편 정근택씨. 현재 수협의 전신인 목포 어업조합의 초대 대표로 아내의 섬 사역을 적극 지원했다.

그러나 문 전도사와 남편 정근택(1892~1950)씨의 후손들은 세간에 알려진 문 전도사의 내용 중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정씨의 4대손인 정원영 제일성결교회 목사를 단독 인터뷰했다. 정 목사는 “역사는 삶의 배경을 제대로 이해한 바탕 위에 전해져야 한다”며 “문 전도사의 순교 사역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삶의 배경을 바르게 기술해야 그의 순교 정신을 제대로 알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늘 순교자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정 목사는 고등학생이던 85년 책 ‘섬마을의 순교자’를 읽고 이상한 점을 한눈에 알아봤다. 정 목사는 “자랑스러운 할머니는 버림받은 여인, 할아버지는 부도덕한 사람으로 묘사됐다”면서 “2000년대 들어 할머니의 이야기는 어느 시골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교회가 주목하는 이야기가 됐다. 두 책에 방송사의 영상물까지 더해져 그 이야기가 사실인 양 정설로 굳어졌다. 이 같은 내용으로 유족들은 30년 이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문 전도사와 남편 정근택씨의 4대손인 정원영 제일성결교회 목사. 신석현 인턴기자

정 목사는 최근 발간한 책 ‘영원한 전도자, 하나님의 사람 문준경’에서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사실을 소상히 밝혔다. 정 목사는 “문 전도사가 불륜의 남편에게 버림받은 불행한 여인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시가에서 사랑을 많이 받은 현모양처였다”면서 “1908년 결혼 후 10여년간 문 전도사와 정씨는 좋은 부부로서 본보기가 되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자녀가 생기지 않아 정씨는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됐고 이것은 대를 이어야 한다는 문 전도사의 권유로 이뤄진 일”이라고 설명했다.

‘섬마을의 순교자’에 나온 첫날 밤부터 정씨가 문 전도사를 소박시켰다는 내용은 왜곡된 사실이라고 했다.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이 정씨가 두 번째 부인인 소복진씨와 낳은 첫딸 정문심씨다. 문 전도사는 1919년 시아버지의 별세로 3년 상을 치르고 정씨 문중의 효부로 인정받았다. 이듬해인 1922년 1월 그는 남편의 두 번째 결혼을 주선했다. 문 전도사는 이들 사이에서 여덟 달 만에 태어난 아이와 난산으로 어려움을 겪은 산모를 정성을 다해 살려냈다. 이것을 지켜본 큰 시숙은 아이의 이름을 ‘문심’(文心)이라 지었다. 문 전도사가 버림받은 여인이라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 전도사의 일대기를 다룬 책들. 신석현 인턴기자

정씨와 소씨가 문 전도사의 복음 사역을 방해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문 전도사는 남편이 두 번째 결혼을 한 후 홀로 생활한다. 그는 전남 목포 죽교동, 정씨 부부는 목포 북교동에 거주했다. 그러나 문 전도사는 평소 소씨와 다정한 사이였고 법적으로 자신의 자녀였던 아이들은 문 전도사를 ‘어머니’로 부르며 잘 따랐다. 문 전도사는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정씨와 의논했다. 경서성서학원에 입학할 때도 정씨가 학비 지원을 했다. 정 목사는 “문 전도사가 증동리교회를 개척한 후에도 정씨는 교회 자금을 위해 증동리 염산 마을에 있는 논을 기증했다. 두 분은 서로 협력하고 존중했던 사이”라고 강조했다.

‘서남해 해상왕’이라고 불린 정씨는 해방 후 목포 어업조합(현재 수협의 전신)의 초대 대표가 될 정도로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재력가인 정씨는 많은 이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다.

정근택씨(앞줄 가운데)가 두 번째 부인 소복진씨(앞줄 오른쪽)와 자녀들과 찍은 가족사진. 자녀들은 법적으로는 문준경 전도사의 자녀들이다. 정원영 목사 제공

‘섬마을 순교자’와 ‘순교자 문준경’은 문 전도사의 수양딸인 고 백정희 전도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했다. 백 전도사는 1940년부터 십 년간 문 전도사와 생활하며 사역을 도왔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문 전도사의 10여년간 이어진 결혼생활, 둘째 부인을 얻는 과정을 전혀 설명하지 못했다. 정 목사는 “백 전도사가 문 전도사와 동거하던 시대는 이미 문 전도사가 정씨를 떠나 사역자의 길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때였다”며 “불행한 부부 생활로 고통받았던 백 전도사 자신의 삶이 일부 투영되면서 두 사람이 정상적 부부가 아니었다고 판단해 버림받은 여인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씨의 후손들은 처음 책이 나왔을 때 당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인 고 이만신 중앙성결교회 원로목사에게 항의했다. 이 목사는 문 전도사의 수제자이자 외가 쪽 조카뻘이 되는 사이다. 이 목사는 직접 감수하지 못했다며 사과했고 다음에 책이 다시 나올 때 꼭 고치겠다고 했다. 2014년 기성에서 발행하는 ‘활천’에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시인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내 전시물과 책 등에 수정된 부분이 반영되지 않았다.

고 이만신 중앙성결교회 원로목사의 친필 사과편지. 정원영 목사 제공

정 목사는 “아이를 낳지 못한 아픔이 있던 문 전도사는 자신의 고난이 결국 복음을 위해 조성한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며 놀라운 사역을 일궜다”며 “폐쇄적 특성이 강한 섬에서 입지적 선교가 가능했던 것은 남편 정씨의 영향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고 이만신 중앙성결교회 원로목사의 친필 사과편지. 정원영 목사 제공

이어 “문 전도사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준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현재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며 “고난을 우연으로 여기지 않고 연단의 과정으로 해석한다면 문 전도사처럼 자신의 사명을 알게 될 것이다. 삶의 질고를 겪는 크리스천, 그리고 청년들이 이 점을 꼭 기억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