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조금씩 세상을 바꿔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널리] 전합니다. 이번에는 특별한 리어카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청년들, ‘끌림’의 오늘을 소개합니다.
허남국 할아버지는 매일 서울 양천구 일대 구석구석을 돈다. 우리와 만난 지난달 21일에는 신정동 한 아파트 단지에서 출발했다. 커다란 리어카를 가뿐히 끌었고 허리에 두른 손잡이를 툭툭 치면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올해 만 여든하나여. 근데도 그 젊은 양반들 덕분에 이걸 이만치 끌고 다녀!”
대학생 몇 명이 허 할아버지를 찾아온 건 5개월 전 어느날이었다. 그들은 훨씬 가벼운 리어카를 주고 양쪽에 광고 스티커를 한 장씩 붙이더니 “이거 끌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저 5000원 남짓 하루 벌이를 하던 그가 어엿한 광고 마케터가 되는 순간이었다. ‘폐지수거 노인’이 아닌 ‘끌리머’라는 멋진 이름도 선물 받았다.
우리는 이날 허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 이 청년들의 하루를 먼저 쫓았다. 한 복지관 앞마당에서 우릴 맞은 사람은 끌림 대표 김진경(22)씨, 마케팅 담당 이다현(23)씨, 신입 매니저 한수진(22)·안유빈(23)씨였다. 이른 아침이었는데 어김없이 또 리어카에 새 광고를 붙이고 있었다.
폐지수거 리어카는 멈추지 않았다
2016년 4월 서울대학교 내 동아리에서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왔다. 폐지수거 노인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공감하고자 한 게 출발점이었다. 단순 지원은 의미가 없었다. 대학생 여럿이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는 세 가지를 콕 짚었다. ‘낮은 수입’ ‘사고 위험’ ‘부정적 인식’ 이것들을 조금이나마 해결해보자는 거였다. 일단 현장에 나가 폐지수거 어르신과 동행했고 며칠을 걸었다. 그러다가 ‘알면서도 몰랐던’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아낸다.폐지수거 리어카는 정해진 길을 매일 천천히 지나고 있었다. 폐지와 고물을 줍는 일이 곧 생계인 사람들이니 당연했다. 누군가는 ‘또 저길 지나네’ 하고 지나쳤을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 끌림은 여기에서 광고 현장을 번뜩 떠올렸다. 폐지수거 어르신들의 일상을 해치지 않으면서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본격적인 광고 수주에 들어갔고 동시에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고민에 돌입했다. 무게 70~80㎏이나 되는 기존의 무거운 리어카를 절반 정도로 경량화하는 일에만 6개월을 쏟았다. 사고 위험을 줄이기 위해 반사 스티커도 제작해 붙였다. 당시 공대생이었던 한 팀원의 역할이 컸다. 취재진과 만난 허 할아버지가 “몸에 딱 맞아요. 지금은 춤을 추면서 끌고 다녀요”라고 말한 바로 그 특수 리어카는 이렇게 완성됐다.
그렇게 4년. 동네 음식점부터 대기업까지 끌림이 받아낸 광고는 70여건이다. 지금까지 함께한 끌리머만 해도 400명이 넘는다. 전체 광고비 중 70%는 고스란히 어르신들에게 가는데, 그 누적금은 3억원에 달한다. 서울 관악구를 중심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서울 전역과 부산, 광주, 인천, 충북 제천에서 끌리머들의 특별한 리어카가 오간다.
이 청년들을 버티게 하는 것
그동안 수십명의 대학생이 끌림을 이끌었다. 모두 20대였고 취업준비생이었다. 공부하는 시간을 쪼개 광고를 따내고 리어카를 만들고 고물상을 찾았다. 그렇다고 보수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남은 광고수익으로 고장난 리어카를 고치고 어르신께 필요한 물품을 사고 나면 이들 손에 쥐어지는 수익은 0원. 간혹 마이너스가 찍힐 때도 있다. 2017년부터 법인 운영을 시작했지만 사정이 특별히 달라지지는 않았다.진경씨는 “모두 학생이다 보니 가장 어려운 건 학업과 병행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지칠 때가 분명히 있죠”라고 말했다. 바쁘게 달린 지난 4년간 모두 한마음으로 토로한 고충이다. 하지만 서로를 통해 확인하는 열정과 책임감이 이 일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수진씨는 “팀원 한 명 한 명이 선한 영향력을 미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어요. 그 모습을 보면 동기부여가 되죠”라며 웃었다. 진경씨 역시 “‘우리 이것도 해보자, 저것도 해보자’며 계속 도전하고 시도하거든요. 그런 열정이 지금의 끌림을 만들지 않았나 해요”라고 덧붙였다.
특히 올해 초부터 대표직을 맡아온 진경씨의 책임감은 남달랐다. 그는 “자부심이 큰 만큼 책임감을 많이 느껴요. 지금 활동하고 계신 끌리머가 250명 정도인데, 그분들께 매달 광고비로 1000만원이 넘는 돈을 드리고 있거든요. 저희가 하는 활동 하나하나가 어르신들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매번 생각하죠”라며 조심스러워했다.
“내 리어카는 벤츠!” 변화가 오고 있다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단 하나다.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확신. 그걸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끌리머들의 밝아진 표정이었다. “이 리어카가 내 벤츠”라며 자랑스러워하는 어르신을 볼 때 느꼈던 짜릿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한 어르신이 기억에 남아요. 저희가 보내드리는 광고비가 너무 고마웠던 거죠. 광고주에게도 끌림에게도 고맙다며 저희 주머니에 몰래 3만원을 꽂아두고 가셨더라고요. 계속 괜찮다고 했는데 ‘학생들 맛있는 거 사 먹어’ 하며 쥐어주셨어요. 정말 힘들다가도 ‘끌림이 있어서 좋다’는 칭찬을 들을 때면 힘이 나요.”
이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는 건 허 할아버지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끌리머가 된 뒤로 뭐가 제일 좋으세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아이, 제일 좋은 건 기분이지!”라며 호탕하게 답했다. 그가 전해준 이야기는 이랬다. 끌림의 선한 영향력이 허 할아버지의 리어카로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 몇몇 시민들은 마주칠 때마다 도움을 건넸다는 것.
“할아버지 고생하셔요. 우리집에 안 읽는 책이 많은데 가져다 드릴게요” “요 옆에 가져가실 거 내놨어요” “날이 더워요. 드시라고 빵 하나 음료수 하나 샀어요”…. 종종 무거운 리어카를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 따뜻한 손길들을 떠올리던 허 할아버지는 “끌리머가 많아지도록 잘 좀 써주세요”라며 기분좋은 당부를 덧붙였다.
끌림의 리어카는 계속 갑니다
이들은 끌림의 리어카가 어떤 변화를 가져오길 바랄까. 팀원 모두가 입을 모아 남은 과제를 설명했다. 다현씨는 “폐지수거 어르신들을 그저 ‘쓰레기를 줍는 사람’ 정도로만 보고 있잖아요. 이분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그렇게 좋지 않아요. 이걸 개선하고 싶어요. 어르신들이 본인을 끌리머라고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라고 강조했다.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성과가 아닌 걸 이들도 잘 안다고 했다. 진경씨는 “그렇기 때문에 끌리머 어르신들께도 ‘저희 광고 끌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려요. 스스로 광고 활동을 하고 그에 맞는 수입을 가져가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실 수 있게요”라고 했다. 그가 인터뷰 전 “어르신들이 무조건 저희 도움을 받는 게 아니다. 그렇게 비치는 걸 원치 않는다”는 말을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마지막으로 ‘그 목표에 어느 정도 온 것 같으냐’는 질문을 던졌다. 네 명의 팀원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동안의 뿌듯함과 고단함, 앞으로의 희망이 한 데 섞인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많은 걸 이뤄왔지만 남은 것이 더 많아요. 갈 길이 멀죠. 끌림이 어르신들께 필요한 한 저희는 계속 달리고 있을 겁니다.”
▼ 영상으로 보는 ‘끌림’과 허 할아버지의 하루
문지연 기자, 촬영·편집=최민석 김다영 기자 jy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