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많은 뮤지컬이 시대에 따라, 시즌에 따라 여러 변화를 요구받았다. 하지만 제자리에 머물러야 진가가 발휘되는 작품도 있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클래식의 대명사 뮤지컬 ‘베르테르’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처음 베르테르 역을 맡은 배우 카이는 최근 국민일보와 만나 “항상 새로움을 고민했지만, ‘베르테르’만은 클래식함이 유지되길 바라던 작품이었다”며 “고전의 숭고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베르테르’는 1774년 출판된 괴테의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작가 고선웅의 감각적인 극본을 토대로 재창작한 뮤지컬이다. 2000년 초연부터 정형화된 서양 뮤지컬의 어법을 내려놓고 스토리와 연출을 한국 감성에 맞게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20년 간 풍성한 실내악 중심의 풍성한 사운드와 드라마틱하지만 절제된 감정선이 어우러져 국내 대표적인 클래식 뮤지컬로 자리매김했다.
줄거리는 소설과 같다. 롯데를 보고 첫눈에 반한 베르테르와 시(詩)를 매개로 베르테르에게 유대감을 느낀 롯데. 베르테르는 사랑을 확신하지만 롯데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뮤지컬은 원작의 롯데와 베르테르의 관계를 부각하면서 특히 베르테르가 겪는 무수한 고민의 순간에 집중했다. 사랑에 빠져 황홀함에 젖어 있다가 점차 고뇌에 휩싸여 흑화하는 베르테르의 섬세한 감정선을 톺아보는 묘미가 있다.
카이는 2008년 팝페라 가수로 데뷔해 2011년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로 뮤지컬에 입문했다. 이후 ‘잭더리퍼’ ‘엑스칼리버’ ‘팬텀’ ‘벤허’ ‘프랑케슈타인’ 등 대형 작품의 타이틀롤을 꿰차면서 대표적인 다작 배우 반열에 올랐다. 그는 배테랑답게 이미 베르테르에 많이 이입해 있었다. “문학을 좋아하고 낭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저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내면 갈등이 마음에 들어요. 그 절실함을 꼭 한번 연기해보고 싶었어요. 단순히 사랑과 고통이라는 단편적인 감정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생각할 부분이 많아요.”
카이가 ‘베르테르’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카이가 지금까지 이 작품을 한 번도 안 했었어?”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만큼 베르테르와 이미지가 꼭 맞았다. 하지만 카이의 생각은 달랐다. “예전에 이 작품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어요. 순수한 베르테르가 될 수는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깊이는 없었을 것 같아요. 감정을 절제해 표현할 수 있는 유연함이 생긴 지금 베르테르를 만나 다행이에요.”
원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1774년 출간 당시부터 파장이었다. 베르테르가 입었던 노란 연미복이 유행처럼 번졌고, 급기야 베르테르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연달아 터지기도 했다. 원작의 파급력 때문에 시각 예술인 뮤지컬과 활자 예술인 소설을 비교하는 독자가 유독 많다. 카이는 “나 역시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소설을 동경했기 때문”이라면서도 “하지만 소설을 함축해 3시간 안에 담아내는 시각예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좋겠다. 특히 음악에 집중해 흐름을 읽는다면 극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적어도 카이의 베르테르는 음악적 만족감 만큼은 최고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괴테의 소설을 시각예술로 구현해낸 무대 질감은 서정적이면서 차갑다. 소박한데, 이상하게도 거칠다. 베르테르의 정열과 그가 겪는 질풍노도의 아픔을 극단적으로 담아내기 위한 의도한 연출이다. 특히 로맨틱 판타지라는 콘셉트를 중심으로 극의 배경인 도시 발하임을 거대 화훼산업단지로 설정하면서 노란 해바라기를 무대 전면에 내세운 연출은 장관이다.
카이는 무대 위 해바라기의 의미를 짚었다. “이 대사가 기억에 남아요. ‘따져 물을 용기가 없어.’ 자책하는 장면이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나약함의 끝일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용기였고 한편으로는 배려였어요. 그래서 머리에 총을 겨누는 순간도 숭고하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베르테르의 마지막을 적나라하게 노출해선 안 됐죠. 이 때 해바라기가 그 의미를 대신 전달해요.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않는 단 한 송이 해바라기가 쓰러질 때 베르테르도 사라지는 거예요.”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