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4학년 여학생 P는 자주 머리가 아프다. 온갖 검사를 다해 보았지만 이상은 없었다. 통증은 갈수록 심해진다. 평소 P는 자기 표현을 너무 하지 않는다. 동생이나 친구들에게 무시를 당해도 화를 낼 줄도 모른다. 원하는 것도 요구하지 않고, 좋고 싫음의 표현이 너무 없으니 부모도 답답하다. 친구들도 화를 낼 줄 모르는 P를 만만히 생각하는 듯하다. 친구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니 특별히 가까운 친구도 없어 외롭다.
P는 몹시 긴장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특히 사람을 대할 때 어려움을 보이며 눈맞춤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감정 상태를 묻는 질문에도 ‘모르겠어요’ 원하는 것을 묻는 질문에도 ‘모르겠어요’만을 반복하였다. 대답을 거부한다기 보다는 정말 자신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표현할 줄도, 심지어 인식할 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부정적인 감정은 배출구를 찾지 못하고 간접적인 채널, 즉 두통으로 나타내고 있는 거였다.
P는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인식하는데 가이드가 필요한 아이였다. 먼저 아이와 점토놀이를 하기로 했다. 점토는 재질의 특성이 손으로 쥐고 주무르며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어 긴장을 이완하는데 도움 되는 놀이이다. 점토로 인형을 함께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 인형에는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투사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것 보다는 수월하게 느낄 수 있다. 원하는 색깔의 점토를 골라 사람의 앞뒤 면을 다르게 표현해 보도록 한다. 한쪽은 슬픈 표정, 다른 쪽은 기분 좋은 웃는 표정으로 만들어 보기로 한다. 점토 인형을 어떤 색깔, 어떤 형태, 크기로 표현하는지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의 표현이다.
“P가 만든 점토 인형은 언제 이런 슬픈 표정일까?” “친구가 놀렸을 때요” “심심한데 놀 친구가 없을 때요” “동생이 못살게 굴 때요” “공부가 잘 안될 때요” 등이다. P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눈치를 보며 부담스러워 하지만 점토 인형에 투사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훨씬 수월하다. 그러면서 차츰 친구가 언제 어떻게 놀렸고, 어떤 상황이 벌어졌고,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좀 편안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반대편의 웃고 있는 기분 좋은 표정을 두고 대화를 나눈다. “언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이런 감정은 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떤 행동이 행복이나 슬픈 감정을 해소하는거나 표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를 물어본다.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사람들은 슬플 때도 있고 우울할 때도 있으며 행복할 때도 있다는 걸 느낀다. 조금 더 분화된 다양한 감정을 인식하게 되고, 감정에 대한 분화된 표현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감정과 관련된 상황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받는지, 어떤 행동이 감정을 유발하는 지를 깨닫게 된다.
어릴 때 양육자가 감정을 충분히 공감해 주고, 그 감정을 충분히 읽어준 경우엔 자연스럽게 정서가 발달되고, 감정의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감정 표현이 당연하고 수월하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 힘든 것이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럴 땐 놀이를 통해서 위협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아이가 자신의 감정으로 조금씩 인식하고, 표현하게 부모가 도와 줄 수 있다.
# 감정을 표현하는 놀이 # 위축된 아이 # 정서 발달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