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정당방위인가, 경찰의 흑인 살인인가…미국, 또 인종갈등 폭발 우려

입력 2020-09-24 08:47 수정 2020-09-24 09:13
미국 경찰 마약수사 과정에 흑인 여성 사망
남자친구가 먼저 총격…경찰 3명, 반격
경찰 2명 면죄부…다른 1명, 살인 아닌 다른 혐의 기소
또 흑인시위 불붙어…다른 지역 확산, 최대 변수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23일(현지시간) 브레오나 테일러 사망 사건에 대한 대배심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미국 경찰이 시위에 참여한 한 청년을 체포하고 있다. AP뉴시스

미국에서 흑백 인종 갈등의 폭탄이 또 다시 터질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대선을 41일 앞둔 23일(현지시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대배심은 흑인 여성이 사망한 사건과 관련해 당시 현장에 있던 경찰 3명에 대해 살인 혐의로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특히 경찰 2명에 대해선 면죄부가 내려졌다.

대배심의 결정이 알려진 뒤 루이빌 시내에선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가 도화선이 돼 미국 다른 지역으로 번질지 여부가 최대 분수령이다. 루이빌에는 장갑차가 배치되고, 이날 오후 9시부터 사흘 동안 통행금지령이 발효됐다.

흑인 여성 브레오나 테일러 사망 사건에 대한 항의하는 시위대들이 지난 6월 25일(현지시간) 켄터키주의 주도인 프랭크포트에 있는 주의회 건물 앞에서 테일러의 사진이 담긴 피켓을 들고 있다. AP뉴시스

사전 경고 없이 ‘심야’ 아파트 급습…남자친구, 먼저 총격

지난 3월 13일 새벽 0시를 조금 넘은 시간, 경찰관 3명이 켄터키주 루이빌에 있는 26세 흑인 여성 브레오나 테일러의 아파트를 급습했다. 병원 응급실에서 일했던 테일러는 당시 남자 친구 케네스 워커와 함께 있었다.

워커가 먼저 경찰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경찰 조나단 매팅리와 마일스 코스그로브는 워커를 향해 총을 쐈다. 이 총격전 과정에서 테일러가 여섯 발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매팅리의 넓적다리는 워커의 총에 맞았다.

또 다른 경찰 브렛 핸키슨은 10발의 총격을 가했다. 실탄 중 일부가 테일러의 옆집까지 날아갔다. 그 집에는 남자와 임신한 여인, 아이가 있었다.

경찰들은 당시 마약 수사와 관련한 영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전 경고 없이 집안에 들이닥쳤다. 경찰이 체포하려 했던 용의자는 마약 판매상 자마커스 글로버였다. 글로버는 숨진 테일러의 예전 남자친구였다고 AP통신은 전했다.

그러나 테일러의 아파트에선 글로버도 없없고, 마약도 발견되지 않았다. 글로버는 총격전이 벌어진 밤, 테일러의 아파트에서 16㎞ 떨어진 곳에서 다른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워커는 이후 조사에서 “경찰을 침입자로 오인해 선제 총격을 가했다”면서 “나는 테일러를 보호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워커는 살인미수 혐의로 이미 기소됐다.

루이빌 시의회도 테일러의 사망 이후 사전 경고 없이 급습하는 것을 금지했다.

10발의 총격을 가했던 경찰 핸키스는 파면됐다. 그러나 매팅리와 코스그로브는 경찰 배지를 뺏기지 않은 채 재판을 받고 있다.

대니얼 카메런 켄터키주 검찰청장은 23일(현지시간) 켄터키주의 프랭크포트에서 브레오나 테일러 사망 사건에 대한 루이빌 대배심 결정을 설명하고 있다. AP뉴시스

“피해자, 경찰 총에 맞았다는 결정적 증거 없어”…FBI, 계속 수사

대니얼 카메런 켄터키주 검찰청장은 23일(현지시간) 루이빌 대배심의 결정을 발표했다. 대배심은 일반 시민이 재판에 참여해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다.

카메런 검찰청장은 루이빌 대배심이 매팅리와 코스그로브에 대해선 워커의 선제 총격에 대한 정당방위를 인정해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매팅리와 코스그로브는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브레오나 테일러 사망 사건과 관련해 경찰에서 파면됐고, 타당한 이유 없이 브레오나 테일러의 이웃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혐의로 기소된 브렛 핸키슨. AP뉴시스

그러나 핸키스에 대해선 타당한 이유 없이 테일러의 이웃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혐의로 기소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핸키스는 1급 위험 혐의로 기소될 예정이며, 이 혐의는 켄터키주 법에선 흉악 범죄 중 가장 낮은 단계라고 로이터통신은 설명했다. 1급 위험 혐의는 최대 5년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카메런 검찰청장은 “핸키스가 쏜 어떤 총알도 테일러를 맞췄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흑인이면서 공화당원인 카메런 검찰청장은 이어 “테일러의 죽음으로 마음이 아프다”면서도 “형법은 모든 슬픔과 비통함에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AP통신은 “경찰들이 테일러에 대한 살인 혐의로는 기소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경찰의 법 위반 가능성에 대해 계속 수사할 방침이라고 AP통신은 보도했다.

“살인으로 기소돼야”…루이빌, 통행금지령 긴장 고조

테일러 가족의 변호를 맡은 인권변호사 벤자민 크럼프는 “이번 결정은 터무니없고 모욕적”이라고 비판했다.

크럼프는 이어 “핸키스가 타당한 이유 없이 이웃집을 위험에 빠뜨렸다면, 테일러의 아파트에도 타당한 이유 없이 위험을 가한 것이 돼야 한다”면서 “이는 타당한 이유 없는 살인으로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배심의 결정이 알려진 뒤 시위대들은 “정의도 없고, 평화도 없다(No justice, no peace)”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루이빌 시내에서 행진을 벌였다. 일부 시위대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3대의 장갑차가 23일(현지시간) 흑인들의 항의 시위를 우려해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시내에 배치되고 있다. AP뉴시스

경찰은 루이빌 시내에 노란색 테이프로 저지선을 쳤다. 시위대와 경찰 간에 실랑이가 빚어져 일부 시위대가 체포되기도 했다.

그렉 피셔 루이빌 시장은 이날 오후 9시부터 사흘 동안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백인 민주당원인 피셔 시장은 “나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시위를 펼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흑인 남성이 지난 5월 25일 백인 경찰에 의해 목이 눌려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흑인 사망 항의 시위가 미국에 들불처럼 번졌다. 일부 시위는 약탈·방화로 이어졌다.

루이빌 지역에서도 테일러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가 계속됐다. 루이빌 경찰은 전날부터 시위를 우려해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미국 경찰에 의한 계속되는 흑인 사망은 이번 대선의 이슈로 비화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루이빌 대배심의 결정과 관련해 “나는 아직 이 사건을 검토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면서 “나는 흑인 사회를 사랑하며 아마도 에이브러험 링컨을 제외하고, 나만큼 흑인 사회에 많은 것을 한 대통령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