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지난해 8월 고객정보 유출 사건과 관련해 카드사들이 피해자들에게 1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효력은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 584명에게만 적용됐다. 한국에는 판결 하나로 모든 피해자가 구제받는 집단소송제도가 일부 분야에만 도입돼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오는 28일 증권 분야에만 제한적으로 시행 중인 집단소송을 모든 분야로 확대하는 내용의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입법예고한다고 23일 밝혔다. 또 판매자 등이 고의적으로 손해를 끼친 경우 손해의 5배까지 배상책임을 지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도 도입한다. 두 법안은 문재인 대통령 공약이었다. 소비자들의 권익을 대폭 향상시킬 수 있는 법안으로 꼽힌다. 법무부는 “효율적인 피해구제와 예방이 이뤄지고 기업들의 책임경영 수준도 높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재계에서는 “각종 소송 남발로 기업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내에서는 집단소송이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쓰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집단소송은 도입되지 않은 상태였다. 배상을 받으려면 반드시 소송인단에 참여해야했기 때문에 피해가 소액인 경우 소송에 나서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법무부에 따르면 집단소송은 분야 제한 없이 피해자가 50명 이상인 모든 손해배상청구에 도입된다. 효력은 소송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신고한 피해자를 뺀 모든 피해자에게 적용된다. 또 집단소송의 1심을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할 수 있다.
법무부는 또 개별 법률로 규정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도 상법으로 일괄 적용하는 개정안을 도입한다. 입증된 손해의 최대 5배까지 배상하는 내용이다. 현재 하도급 거래 등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도입돼 있다. 상법 전반에 도입되면 언론사의 ‘고의적인 가짜뉴스’에도 적용이 가능해진다. 다만 상법 개정 후 발생한 불법 행위만 대상이다.
두 제도는 해외에서는 폭넓게 활용된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1994년 미국에서 발생한 맥도날드 커피 소송이 잘 알려져 있다. 커피를 쏟아 화상을 입은 할머니가 치료비 16만 달러 외에 286만 달러를 배상 받았다. 이후 맥도날드가 일회용 컵에 ‘커피가 뜨거우니 주의하라’는 문구를 새겼다. 미국은 엔론 분식회계 사건 당시 투자자들이 집단소송을 통해 72억2700만 달러를 배상받았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기업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가 생기는 셈이다. 그간 한국에서는 기업의 위법행위가 명백해도 기업이 ‘소송으로 끝까지 가보자’고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으로 기업이 선제적으로 합의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종의 기획 소송이 남발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사실상 민법으로 형사적 제재를 가하는 ‘이중처벌’이라는 시각도 있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실장은 “두 제도가 도입되면 기업들은 정상적 경영활동이 어렵다”며 “특히 소송 대응이 취약한 중소·중견 기업들의 피해가 막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도입 취지는 동의하지만 거액의 배상을 목적으로 한 기획소송 등 우려가 크다”며 “소송 중도에 기업에 합의금을 종용할 가능성도 있어 기업들은 상시적인 소송 리스크에 시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기업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경영활동이 더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나성원 권민지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