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책이었으면!” n번방 추적단 불꽃의 소망

입력 2020-09-23 05:00 수정 2020-09-23 11:34
'추적단 불꽃'과 신간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표지. 박민지 기자

지난 1년을 쉼 없이 뛰었다. 지난해 9월 공모전에서 받은 우수상은 인생을 통째로 바꿔 놨다. 텔레그램 n번방 속 성착취 실태를 처음 발견해 신고하고, 어둠에 갇힌 피해자에게 손 내민 지 어느덧 1년. 시작은 책임감이었다. 처음부터 디지털 성착취 근절이라는 거대한 방향성을 설정하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피해자 한 명 한 명에 집중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백 명의 손을 잡았어도 미처 닿지 못한 한 명이 마음에 남았다. 힘껏 내달려도 지치지 않을 수 있던 무한한 동력은 선한 연대였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9월,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숨을 고른다. 앞만 보고 질주했던 지난 길을 짚어보고, 또 전진할 방향을 매만지기로 했다. 다시 신발 끈을 조이고 있는 ‘추적단 불꽃’의 이야기다.

불꽃의 첫 에세이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가 23일 공개됐다. 출간에 앞서 국민일보와 만난 불꽃은 “지금까지 우리의 이야기는 언론을 거쳐 대중에 전해졌다”며 “n번방 사건 이후 모든 삶이 바뀐 우리가 직접 불꽃의 언어로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이내 “주변에서 책 나오면 사인을 해달라는데, 아직 못 만들어서 큰일”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영락없는 평범한 20대 여성이었다. 신변 보호를 위해 익명으로 활동하는 불꽃은 각각 ‘불’과 ‘단’이라는 예명으로 집필했다.

'추적단 불꽃'과 신간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표지. 박민지 기자

불은 “지난 3월 국민일보 ‘n번방 추적기’ 보도 이후 인터뷰 요청이 몰아쳐서 처음에는 출간은 엄두도 못 냈다”며 “하지만 사건이 왜곡되는 걸 보면서 독립된 통로가 필요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유튜브 등으로 소통하긴 했지만 긴 호흡으로 깊이 있게 사건을 다룰 수 있는 창구가 필요했다”며 “기록은 곧 역사가 된다. n번방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답습하지 않도록 책을 통해 기록으로 남겨둬야 했다”고 말했다. 단은 “이 사건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며 “역사로 남겨 다시는 반복되지 않길 바랐다”고 전했다.

출간의 또 다른 목적은 ‘누구든 불꽃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다. 불은 “우리가 비범한 영웅이라서 이런 일을 해낸 게 아니다”라며 “불꽃의 성장기를 통해 지극히 평범한 여성들이 겪는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고, 누구나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는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 ‘2019년 7월 그날의 기록’과 3부 ‘함께 타오르다’가 연결되고, 2부 ‘불과 단의 이야기’는 불꽃의 에세이다. 1부는 n번방을 발견한 지난해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추적을 시작한 순간부터 지난 3월 조주빈(박사)가 잡히기까지의 상황이다. 3부는 조주빈 검거 일주일 후부터 시작한다. 1부에서 추적 과정을 상세하게 다뤘다면 3부는 드러나지 않았던 불꽃의 활동을 녹여냈다. 불꽃이 상황을 전달하는 식의 언론 인터뷰보다 더 힘을 쏟았던 일은 제도 개선과 피해자 보호를 위한 활동이었다. 여성가족부, 국무조정실, 전국 경찰청 등을 방문해 의견을 피력하고 실질적인 대책을 제안했다. 피고인 조사나 사건 증언 과정도 담았다.

2부는 오롯이 불꽃의 이야기다. 각자의 어린 시절과 서로를 만나고 친해지기까지의 과정,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된 이유 등을 진솔하게 기록했다. 불꽃은 “2부가 핵심”이라며 웃었다. 불은 “현실을 사는 20대 여성의 고민과 일상을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싶었다”며 “남성들도 간접적으로 20대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2부 내용을 소개하는 단의 목소리는 유독 들떠있었다. 단은 “페미니스트가 되기까지의 시행착오를 담았는데, 아마도 20~30대 여성들은 많이 공감할 것 같다”고 전했다.

지난 5월 국민일보와 '추적단 불꽃' 방담 당시 모습. 윤성호 기자

불꽃은 “책 제목 정말 좋지 않아요? 조금 길죠?”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은 “여성과 여성의 연대를 제목에 녹였다”며 “개인이 우리가 되면 그 힘이 얼마나 강해지는지 많은 여성이 느끼고 있다. 변화의 동력은 연대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힘을 합치면 얼마나 더 큰 파급력이 생길지 궁금해 만든 제목”이라고 설명했다. 단은 “돌아보면 여성들은 늘 2등이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계층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면 유독 비판이 거셌다”며 “그래서 여성들의 연대가 귀중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제목에 여성의 연대를 녹였다면, 서문에는 피해자와의 연대를 담았다. ‘우리 이제 함께 걸을까요?’는 이 책의 상징적인 문장이다. 불은 “한 피해자는 지금도 외출을 못 한다”며 “하지만 용기를 내달라는 말을 감히 못 했다. 다만 우리가 함께 걸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단은 “한 시상식에서 소감으로 ‘앞으로 피해자와 동행하겠다’고 말했다”며 “불꽃이 동행하듯 독자도 함께 걸어달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전했다.

불꽃은 아직 책 실물을 받지 못했다며 표지가 담긴 태블릿을 가슴팍에 꼬옥 끌어안았다. “책 어떠셨어요? 많이 읽어주실까요?”라고 수시로 물었다. 바쁜 와중 얼마나 공을 들인 결과물인지, 애정이 남달랐다. 이 책이 사회에 어떤 의미로 남았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불꽃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 고민했다. 대답은 간결했다. 불은 “다 읽고 덮었을 때 아주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길 바란다”고 했고, 단은 “10~20대 자녀와 부모님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묻자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게 디지털 성착취를 다룬 마지막 책이었으면 좋겠어요.” 불꽃의 목소리에 제법 비장함이 묻어났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