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겨자씨 비유를 모르는 크리스천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식물만큼 우리가 오해하는 것도 흔하지 않다. 겨자에 대한 오해는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잘못 번역해서 일어난 문제도 아니고, 그저 성경이 기록된 현장에 대한 우리들의 무관심 때문에 벌어진 왜곡이다.
아주 오래전, 이스라엘에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선교사 한 분을 우연히 만났다. 하루는 그분을 따라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를 방문하는 행운을 얻었다.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무덤을 방문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동네 꼬마들이 손에 무엇인가 들고 나를 상대로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다. 난처해하는 나에게 선교사님은 꼬마들이 손에 든 것은 겨자씨인데 한국에서 성지순례 오시는 분들이 자주 찾아 이제는 가게에서 기념상품으로 판매한다고 설명했다. 그때 내가 처음 보았던 겨자씨는 검은색으로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작은 겨자씨를 코팅해서 만든 책갈피가 한국에서 최고 인기 있는 성지순례 기념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학기가 시작된 후, 그 작은 씨는 겨자씨가 아니라 담배씨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2~3월쯤, 이스라엘에서 겨자 꽃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갈릴리 지역을 비롯해 평지의 들녘과 같이 비가 많이 내리고 기온이 온화한 곳은 온통 겨자 꽃으로 뒤덮인다. 그 모습은 마치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활짝 피어난 유채꽃밭과 같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겨자는 들에서 자생하거나 밭에서 재배됐다. 히브리어로 하르달, 헬라어로 시나피로 불리는 십자화과 1년초다. 주로 약용이나 식용유를 만드는데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겨자씨는 그 크기가 좁쌀만 하고, 종류는 크게 검정과 흰색 계통으로 구분된다. 노란색 꽃을 피우고, 보통 1m가 채 되지 않는 크기로 자란다. 하지만 토양이 좋고 햇볕이 잘 들어 기온이 따듯한 곳에서 검정 겨자씨는 3m까지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겨자를 한국의 순례객들은 좀처럼 성경에 비유로 등장하는 겨자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겨자씨에 대한 비유는 성경에 두 번 나타난다. 마태복음 13장 31~32절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겨자씨를 비유로 사용하셨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그리고 누가복음 17장 6절에 예수님은 ‘믿음’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 겨자씨를 사용하셨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우리가 알고 있는 겨자는 이 두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기록된 현장을 고려하지 않고 말씀에만 근거해서 우리가 확신하는 겨자는 어떤 것인가.
첫째 겨자씨는 씨 중에 가장 작은 씨라고 믿고 있다(물리적 크기로만 접근한다). 둘째로 겨자는 나무라고 믿는다(식물학적 접근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셋째로 겨자 나무는 새들이 깃든다고 생각한다(이 표현은 겨자가 나무라는 이미지를 더욱 확고하게 만든다).
이 같은 선입견이 한국의 성도들에게 너무나 깊게 각인된 결과, 이스라엘에서 씨들 가운데 가장 작은 씨를 찾았고, 그래서 찾아낸 것이 예수님 당시 이 땅에 자생하지도 않았던 담배씨였다. 또 주변이 온통 노란 겨자꽃으로 뒤덮여 있는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때로는 좁쌀만 한 겨자씨를 채취하면서도, 겨자 줄기를 입에 넣고 겨자 맛이 난다고 놀라면서도, 겨자 꽃밭 한복판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상했던 겨자 나무와 현장에서 만난 겨자 사이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갭(gap)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처음 말씀이 선포됐던 현장의 언어, 생활, 자연환경, 즉 문화적 배경을 통해서 성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바르게 이해하고 또 올바른 소통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겨자씨의 진실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씨 중에 가장 작은 씨’라는 표현이다.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다. 성경에 사용된 ‘씨’는 헬라어로 스페르마로 보리, 밀과 같은 곡식 알갱이를 지칭하는 단어다. 좁쌀만 한 겨자씨는 밭에 심는 곡식 알갱이들 가운데 작은 씨로 표현해도 1세기 청중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비유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가장 극대화하기 위해서 강조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두 번째로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된다는 것이다. 식물학적으로 나무 형태의 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경을 주의 깊게 관찰하거나 상식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이 같은 표현은 씨 중에 가장 작은 씨로 표현한 것처럼 극적인 과장법을 통해서 청중들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고 비유의 의미를 확고하게 심어주기 위한 수사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겨자씨가 자라면 가지를 내고 새들이 깃들게 된다는 표현이 겨자에 대한 우리들의 왜곡된 선입견을 확고하게 만든다. 이 말씀 역시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형상화 시키는 역할을 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스라엘의 겨자는 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5월이 되면 마르기 시작한다. 누렇게 말라버린 겨자 줄기는 마치 고춧대와 같이 단단해지고, 그곳에 새들이 떼를 지어 깃드는 모습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다.
마지막으로 겨자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는 1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용적 표현에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 겨자씨는 ‘작은 것’을 의미했다. 씨 가운데 겨자씨보다 작은 씨는 얼마든지 있지만 말씀이 선포된 현장에서 겨자씨는 작은 것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겨자씨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더 과제가 남아있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현장에 있던 청중들과 소통하고 싶었던 본질적 의미에 관한 궁금증이다.
예수님은 우선 하나님 나라의 변화력(changing power)에 대해 청중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겨자씨 비유를 아주 극적으로 사용하셨다. ‘씨 중에 가장 작은 씨’로 시작해서 ‘자라서 나무가 된다’고 과장해 표현하시고, 거기에 ‘새들이 가지에 앉는 모습’을 더해서, 커다란 나무의 이미지를 완성함으로 예수님은 그 변화의 힘, 변화의 폭을 전달하셨다. 과연 누가 겨자씨를 보고 새들이 깃드는 나무로 변화될 것을 상상 할 수 있겠는가. 복음의 씨가 떨어지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순간 변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 변화를 경험하지 않고 그 깊이와 크기를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또 하나님 나라의 전파력(spreading power)에 대해 청중들과 소통하기 원하셨다. 봄이 오면 이스라엘 전 지역은 겨자 꽃으로 뒤덮인다. 겨자씨 하나가 땅에 떨어져 싹이 나면 이듬해 그 지역은 겨자밭으로 변해버린다. 겨자씨의 전파력은 그 땅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 또한 그 전파력에 있지 않은가.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 전한 복음이, 그리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으니 말이다.
봄철 이스라엘에 가면 노란 꽃이 활짝 웃음을 머금고 어디서든지 답사객들을 반길 것이다. 그 꽃이 겨자라 하면 더 이상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겨자씨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전하려 했던 예수님과 소통하는 1세기 갈릴리 호숫가의 청중들이 되어 보길 바란다.
김상목 성경현장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