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려면 ‘킹키부츠’를 신어라[리뷰]

입력 2020-09-21 05:00

이토록 치명적인 ‘레드 힐’은 본 적 없다. 자신을 찬양하고, 모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며 무대에 꼿꼿이 서 있는 이 신발은 ‘킹키부츠’다. ‘비정상’이라며 손가락질해도, ‘여자도 남자도 아닌’ 인간이라며 눈 흘겨도 결국 스포트라이트는 롤라를 비췄다. 인생을 바꾼 기적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 ‘킹키부츠’는 사회의 편견과 억압을 기분 좋게 쳐낸 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면서 황홀한 음악과 함께 내면의 파동을 자아내는 위로였다.

20일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에서 ‘킹키부츠’ 300회 공연이 열렸다. 이날 모든 관객은 절대반지를 하나씩 선물 받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바깥 생활에 제약이 걸려있지만 이날만은 매진을 만끽해도 괜찮았다. 좌석 거리두기제를 실시하고 있어 관객석이 이전만큼 북적이지는 않았지만 300회를 응원하기 위해 찾은 관객은 연신 박수를 쏟아냈다. 이날 커튼콜에는 배우의 특별 인사와 관객과 함께 하는 포토타임이 마련됐다. 불이 반짝이는 절대반지를 낀 관객은 배우를 향해 힘껏 손짓했고, 인사말을 하는 배우들은 연신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킹키부츠’는 1979년 영국 노샘프턴의 신발 공장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2014년 초연했고, 올해 버전은 4번째 시즌이다. 찰리는 정통 수제화를 만드는 공장을 물려받아 경영하는데, 지속된 경기침체로 저렴한 신사화가 대량 수입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찰리는 유행을 따르지 않고 오직 장인정신이 깃든 신사화만 취급하던 아버지의 고집을 내려놓고 틈새시장을 찾기 시작한다.


이때 드디어 롤라가 등장한다. 그야말로 최재림의 무대다. 최재림의 롤라는 시작부터 끝까지 강렬하다. 짧은 치마에 짙은 화장을 하고 킬힐을 신은 그는 드래그 퀸이다. 롤라는 자신을 단순히 여장 남자가 아닌 특별한 존재로 정의했다. 성 정체성의 혼란을 기반으로 하지 않아 남성의 신체 특성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최재림은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를 내며 앙칼진 제스처를 선보이다 돌연 정장을 입고 특유의 굵은 목소리를 낸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사회의 시선에 온몸으로 물음표를 던지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여자처럼’ 화려하게 치장하고 무대를 종횡무진 뛰어다닌다.

‘롤라 장인’다운 농염한 말투부터 파르르 떨리는 손끝까지 최재림이 연기하는 롤라는 시종일관 숨을 조이며 몰입을 끌어낸다. 최재림 특유의 아재 개그는 객석 분위기를 한껏 달아오르게 했고, 매혹적인 몸짓과 치명적인 말투는 극장 전체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묵직한 저음과 청량한 고음이 이어질 때는 “역시 최재림”이라며 절로 엄지를 치켜세우게 했다.

롤라를 중심으로 한 드래그 퀸의 무대는 가히 환상이다. 롤라의 정체성은 분명 남성이지만 드래그 퀸 특성상 공연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유희적이고 과장된 연출이 많다. 롤라는 이 과정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는다고 했다. 비말 감염을 우려해 함성을 지를 수 없었지만 곳곳에서 저도 모르는 탄성이 터져 나올 만큼 롤라의 모든 몸짓이 아찔했다.

찰리가 찾던 틈새시장은 롤라가 신은 신발이었다. 남성도 신을 수 있으면서 허벅지까지 오는 80㎝의 부츠. 남성의 체중을 감당할 수 있는 튼튼한 굽을 가진 신발. 롤라는 찰리의 공장의 디자이너가 됐고 둘의 팀워크는 붕괴 직전의 공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킹키부츠에 사활을 건 찰리의 아집 탓에 공장 직원과 불화가 터지기도 했고, 드래그 퀸이 무대에 오르면 좋겠다는 롤라의 제안에 찰리가 비수 꽂힌 말을 쏟아내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마주할 수 있던 수확이었다.

극의 메시지는 여기에 있다. 화려한 퍼포먼스를 걷어내면 그 안에 희로애락이 모두 담긴 이 공연의 메시지는 결국 이렇게 귀결된다. ‘인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니,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 롤라가 사실상 이겼지만, 결과적으로는 진 돈과의 복싱 대결에서 수행할 벌칙(?)이기도 한 이 명제는 신발 공장과 롤라 모두의 인생을 바꿨다. 돈이 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밀라노에 킹키부츠를 전시할 기회가 생겼고, 이어 찰리가 롤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킹키부츠의 진가가 제대로 빛났다.

찰리를 연기한 이석훈의 연기도 압권이었다. 찰리는 아버지의 공장을 이어받아 모두를 아우르며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평면적인 캐릭터가 결코 아니다. 이석훈은 빠르게 쏟아내는 대사 속에 레드 힐을 만들 때의 흥분과, 현실의 벽 앞에 무너져 느낀 좌절감, 롤라와의 대치 상태에서 오는 분노의 감정이 뒤섞인 입체적인 캐릭터를 훌륭히 완성해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