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성명을 발표해 옥살이를 겪은 고(故) 지학순 주교(1921~1993)가 46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4부(부장판사 허선아)는 17일 고 지학순 주교의 대통령긴급조치 위반 등 혐의의 재심 선고 공판에서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특수공무방해 등 혐의에 대해서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대통령긴급조치 1·2·4호는 발동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헌법상 보장된 국민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위헌”이라며 “입법의 목적이나 정당성이 적절하지 않고 헌법상 표현의 자유 등을 침해해 무죄가 선고돼야 한다”고 밝혔다.
지 주교가 과거 주거 제한 명령을 받은 상태에서 밖에 나가려다 공무원을 밀친 혐의 등에 대해서는 “다시 실체판단을 할 수 없어 원심에 따라 유죄로 인정한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집행유예로 감경한 배경에 대해 “유죄를 뒤집을 수는 없으나 내란선동죄에 있어 피고인의 행동으로 국가안녕과 질서에 큰 위험이 발생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 공무원을 폭행한 정도가 중하지 않은 점, 사건 당시 민주화라는 시대적 상황 등을 고려해 형량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지 주교는 1974년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체포돼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지만,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계의 대대적인 시위로 이듬해 2월 석방됐다. 그는 청소년 교육과 빈민 결핵치료 등을 도왔고, 민족화해와 통일운동에 힘을 쏟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0년 “긴급조치 1호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 헌법에 위반된다”며 유신시대 공포된 대통령긴급조치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후 4호, 9호 등 위헌 결정이 잇따랐고 검찰은 2018년 지 주교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