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는 단지 어린아이였습니다. 유족과 학교 선생님, 이웃 주민들이 기억하는 피해자는 밝고 명랑한 아이였습니다”
선고를 내리던 판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조용하던 법정 곳곳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관이 꿈이었던 아이는 학교에서 점차 말수고 줄고 얼굴에 그늘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피고인을 엄마라고 부르고, 마지막까지 자신을 구해달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참혹한 결과를 막을 수 있는 기회도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동거남의 9살 아들을 여행용 가방에 가둬 숨지게 한 비정한 계모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형사 1부(부장판사 채대원)는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A씨(41)에게 징역 22년을 선고했다.
A씨는 지난 6월 1일 정오쯤 충남 천안시의 한 아파트에서 동거남의 9살 아들 B군을 가로 50㎝·세로 71.5㎝·폭 29㎝ 크기의 여행용 가방에 3시간 정도 가둔 뒤, 다시 더 작은 크기의 가방(가로 44㎝·세로 60㎝·폭 24㎝)에 약 4시간 동안 가둬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부는 A씨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다. A씨가 저지른 일련의 행위때문에 B군이 숨졌을 가능성이 높고, 범행 동기 및 B군과의 관계 등에 비추어 볼 때 살인에 대한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가 첫번째 가방에 불편한 자세로 들어가 있는 것을 알았음에도 외출을 했다. 첫번째 가방에서 나온 피해자가 땀과 소변 범벅이었는데도 두번째 가방에 다시 가뒀다”며 “플라스틱 재질의 가방 위에서 뛰는 것은 객관적으로 봐도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행동이다. 또 피고인은 수사기관에서 가방 속 산소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진술했다”고 했다.
이와 함께 재판부는 ‘가방 위에 올라간 적은 있지만 뛰지 않았고, 가방 밖으로 뺀 B군의 손을 안으로 집어넣기 위해 드라이기 바람은 손에만 쐈다’는 A씨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현장을 목격한 피고인의 친자녀들은 피고인이 가방 위에서 뛴 것을 봤고, 자신들도 가방 위에 올라가도록 한 뒤 번갈아 뛰게 했다고 진술했다”며 “자녀들은 또 드라이기를 30초정도 작동해 가방안으로 바람을 불어넣었다고도 말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특히 A씨가 B군을 자신의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됐을 가능성에도 주목했다.
B군을 학대한 일 때문에 B군의 친부와 자주 다투며 가정에 균열이 생겼다고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의 등을 발로 차 머리를 다치게 한 이후 친부와 크게 다퉜다”며 “친부가 피해자를 데리고 나가서 살겠다 하고, ‘친자녀들도 친부에게 보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피해자를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후 피해자에 대한 감정이 더욱 안좋아져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학대를 가했다”고 말했다.
A씨가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범행 수법이 극히 잔인하고 피해자에 대한 연민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분노만이 느껴진다”며 “피고인이 반성문을 다수 제출했는데, 반성문에서조차 아이가 잘못했다며 나쁜 아이를 훈육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변명했다. 진정으로 반성하고 참회하는지 의문”이라고 판시했다.
이어 “피해자의 유족들은 아이를 구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 있다. 피고인은 친자녀들까지 범행에 가담시켜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갖게 했다”면서도 “피고인의 형사처벌 전력이 없고, 확정적 고의가 아닌 미필적 고의인 점 등을 감안해 형을 정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일각에서는 보다 엄벌에 처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공혜정 대표는 이날 재판 종료 이후 “아동학대 범죄의 형벌이 징역 15~20년인데, 이 사건의 끔찍함에 비추어보면 더한 엄벌에 처했어야 한다”며 “아동학대 살인은 범행 기간이 더욱 길고 잔혹하다. 일반 양형 기준이 아닌 더 높은 양형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천안=전희진 기자 heej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