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임원들의 사진을 찍어 공유하려 했다. 뒤쪽에 있던 피해자는 우연히 찍힌 것이다.”
2018년도 행정고시에 합격한 A씨는 연수 도중 다른 여자 교육생을 불법 촬영했다는 이유로 윤리위원회에 회부됐다. 그는 피해자가 사진 배경에 나온 것을 뒤늦게 알았다며 불법 촬영의 의도가 없었다고 항변했다.
진상조사를 한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은 지난해 5월 “피해자 뒷모습을 허락 없이 촬영했다. 교육생의 품위를 크게 손상시키는 행위에 해당한다”며 퇴학 처분을 내렸다. 5급 사무관이 될 수 있었던 A씨가 ‘몰카범’으로 전락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런데 인재개발원 측이 A씨를 성폭력처벌법 위반(카메라등이용촬영) 혐의로 고발한 사건이 지난해 11월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 됐다. A씨 주장처럼 범죄의 고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인재개발원 측은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항고했지만 기각됐다. 그러자 A씨는 인재개발원을 상대로 “퇴학처분의 무효를 확인한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에서는 A씨가 촬영한 두 장의 사진 속 피해자의 위치를 놓고 공방이 오갔다. 처음 찍힌 사진에는 허리를 굽힌 피해자의 허벅지 뒷부분 일부가 노출된 사진이 찍혔다. 3초 후에 찍힌 두 번째 사진은 피해자가 서 있는 뒷모습이 나와 있었다. 두 사진 모두 상단은 피해자가 속한 분임조가, 하단은 A씨가 속한 분임조가 찍혔다.
인재개발원 측은 당시 A씨의 촬영 상황을 목격했던 교육생 진술을 퇴학 처분의 근거로 제시했다. A씨의 촬영 사실을 신고했던 한 교육생은 “피해자의 치마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A씨가 ‘어우’하는 탄식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휴대전화를 가슴 쪽에 부자연스럽게 붙이면서 조작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A씨가 ‘왜 화면이 뿌옇지’라고 하면서 휴대전화를 내려놓을 때 카메라가 켜져 있는 것을 봤고, 이후에도 한 차례 휴대전화를 몸 쪽에 붙여 촬영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고 했다.
특히 문제된 것은 A씨가 사용한 ‘무음 카메라’ 앱이었다. 인재개발원 측은 A씨가 피해자의 신체 부위가 일부 노출되고 있는 상황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촬영음이 나지 않는 앱을 사용해 불법 촬영을 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분임원과 공유하기 위한 목적의 사진이었고, 피해자는 우연히 배경의 일부로 찍혔다고 항변했다. 화질이 좋은 카메라가 아니라 분임원들의 얼굴이 화사하게 나올 수 있는 ‘셀프 카메라’ 앱을 이용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그는 ‘특정 신체 부위의 부각 여부, 피해자의 옷차림과 노출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불법촬영 범죄 관련 판례를 인용하며 “특정 신체부위를 부각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펼쳤다.
서울고법 행정9부(부장판사 김시철)는 10일 A씨 측 주장을 받아들여 1심과 같이 “퇴학 처분은 무효”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A씨 주장처럼 피해자가 확대되거나 신체 부위가 부각된 사정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교육생의 목격담은 믿기 어렵다고 했다. 이 교육생은 A씨가 ‘어우’라는 소리를 냈다는 증언했는데, 더 가까이 있던 다른 목격자는 이를 듣지 못했다고 진술했었다. A씨가 첫 사진을 찍은 뒤 ‘왜 화면이 뿌옇지’라고 한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사진을 찍은 정황이 있다는 증언에 대해선 “실제 촬영 간격이 3초에 불과해 신빙할 수 없다”고 했다.
오히려 재판부는 인재개발원 측의 진상조사 절차가 위법했다고 봤다. A씨는 인재개발원 조사 과정에서 “사진을 지운 적이 없다. 디지털 포렌식을 해도 상관없다”며 스스로 휴대전화를 제출했다. A씨 휴대전화에서 다른 신체노출 사진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인재개발원 측은 A씨가 회부된 윤리위원회가 열리기 3일 전까지 목격자들의 진술서 열람·복사를 허용하지 않고, 사진 원본파일이 저장된 휴대전화를 반환해달라는 요청도 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판부는 “원고의 방어권 행사 기회를 실질적으로 제한했다”며 퇴학처분은 위법하다고 밝혔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