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자궁 속으로 여행하고, 식물과 한몸이 된다면

입력 2020-09-11 06:00 수정 2020-09-11 06:00
#1. 젤리처럼 말랑말랑하고 투명하다.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막상 만지면 장난치듯 금세 달아날 것 같은 저 무엇. 인공물 같기도 하고 생명체 같기도 한 형상에는 탯줄 같은 꼬리까지 달려 있다. 유유히 유영하는 그 모습은 어머니 자궁 속에서 기분 좋게 헤엄쳤던 근원적 기억까지 건드린다(제니퍼 스타인캠프 작품).
제니퍼 스타인캠프, '레티날 1', 비디오설치, 2018. 리안갤러리 제공

#2. 흰 도자기로 빚은 얼굴 주변에 나풀 나풀대는 프릴(잔주름을 잡은 장식천)에 눈길을 주다가 순간 공포영화를 보는 것처럼 소스라쳐 놀라게 된다. 프릴인 줄 알았던 게 아연 식물의 잎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건 식물과 한 몸인 인간?’하고 상상하게 되는데, 출품한 작가는 회심의 미소라도 짓듯 뒤쪽에 선인장 화분을 올려놓았다(김나리 작품).

코로나 19 사태가 길어진다. 몇 계절을 갈아치웠다. 사회적 격리의 시간이 길어지며 무료함을 넘어 우울과 무력감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미술관과 갤러리일지 모르겠다. 명상을 제안하고 위로를 건네기도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개인적 위안을 넘어 인간 탐욕이 초래한 생태 파괴에 대한 반성으로 이끄는 전시를 소개한다.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리안갤러리와 율곡로 리만머핀갤러리는 공동으로 미국 작가 제니퍼 스타인캠프(62)의 ‘소울즈(Souls)’전(10월 31일까지)을 하고 있다. 스타인캠프는 미디어 설치 작가로 ‘주디 크룩스’로 유명하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나무 한 그루.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져 열매를 맺더니 다시 잎이 떨어지는 게 순간이다. 그의 탁월한 렌더링(2차원의 화상에 광원·위치·색상 등을 고려해 사실감을 불어넣어, 3차원 화상을 만드는 과정을 뜻하는 컴퓨터그래픽 용어) 기법 덕분에 관객은 단 몇 분 만에 그 나무를 통해 1년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 순환성에서는 인생의 무상함보다는 생명의 환희가 전해진다.
제니퍼 스타인캠프, '정물 4'(2020), 비디오설치작업, 리안갤러리 제공

작가는 지하 전시장에 나란히 설치한 영상 작품 ‘레티날 1’‘레티날 2’로 자신의 주제 의식을 더욱 밀어붙인다. 하나는 붉은색, 다른 하나는 파란색을 주조로 한 화면에 비정형의 방울 덩어리가 분주히 움직이는 영상 2개가 나란히 펼쳐져 있다. 무엇보다 그 움직임 자체는 촉각에 대한 욕구를 자극한다. 보는 것에서 얻는 만족보다는 엄마 젖을 만지며 느꼈던 편안하고 안온했던 유아기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기분을 준다.

반대쪽 벽면에 설치된 ‘정물 4’는 갖가지 과일과 꽃이 둥둥 떠다니는 영상이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바니타스(덧없음을 뜻함) 정물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해골, 썩은 파이, 농익은 과일, 유리컵 등의 정물을 그려 인생무상을 환기해 그렇게 불린다. 스타인캠프의 작품에서는 긍정적 에너지와 생의 환희가 넘쳐 전통적인 바니타스 주제를 뒤엎는다. 가을이 주는 침울함, 깊어지는 코로나의 우울을 걷어낼 기쁨의 감정이 샘물처럼 솟아 나오는 영상이다.

리만머핀갤러리에서는 지구 생명의 초기를 묘사하는 ‘태고의 1’, 울창한 자작나무 숲을 정면으로 묘사한 ‘보이지 않는 눈 4’ 등이 나왔다.

서울 은평구 진관1로 사비나미술관에서 하는 ‘나 자신의 노래’전도 명상과 사색의 시간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전시 제목은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시인 월트 휘트먼의 동명의 시에서 따왔다.
김나리, '먼 곳으로 2', 세라믹, 2018-2020. 손영옥 기자

전시장을 들어서면 발길을 붙잡는 것은 좌대에 올려진 흰 여인 두상들이다. 김나리 작가의 ‘먼 곳으로 2’는 지금의 나를 닮은 듯한 표정의 리얼함에 놀라게 된다. 이어 반식물반인간 같은 얼굴의 기괴함에 다시 놀라게 된다. 생태를 파괴해 코로나 위기를 초래한 인간의 탐욕을 질타하는 거 같다. 해골을 감싸 안은 소녀상에선 ‘바니타스’가 떠올라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김나리 작 '먼 곳으로 2', 세라믹, 2018-2000. 사비나미술관 제공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옆으로 발길을 돌리면 스파이더맨 같은 가면이 있어 구미가 동한다. 한승구 작가의 ‘미러 마스크’다. 그 모습이 신기해 가까이 가면 일순 가면은 거울로 변하며 그 속에 내 얼굴이 비친다. 너가 내가 되는 순간이다. 이렇듯 작품들은 시종 나를 돌아보게 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모두가 가꾸어 가는 공동체를 생각하게 한다. 원성원, 배찬효 등 13명의 작가가 초대받았다. 11월 14일까지(일부는 19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