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리클이여, 영원하라!”
내한 뮤지컬 ‘캣츠’의 개막을 알리는 암전이 시작되자 객석 곳곳에서 젤리클 고양이들이 하나둘 출몰했다. 사려 깊은 고양이, 정의로운 고양이, 곡예 고양이, 관능적인 고양이, 천방지축 고양이…. 얼핏 보면 지금까지 봐왔던 젤리클 고양이들과 비슷해 보였지만, 분명 달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객석도 한 자리씩 띄어 앉는 상황에서 자유분방한 고양이들을 객석에 무작정 풀어놓을 수 없었다. 오랜 고심 끝에 고육지책으로 꺼내든 카드는 ‘메이크업 마스크’. 객석을 휘젓는 고양이들은 얼굴 분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객석을 활보하며 관객과 호흡하는 작품 고유의 매력을 살리면서 코로나19를 정면으로 뚫어보겠다는 제작진의 고민이 느껴졌다.
9일 서울 송파구 샤롯데시어터에서 젤리클 축제가 열렸다. 1981년 초연 이래 끊임없이 변화하며 작품의 생명력을 입증한 뮤지컬 ‘캣츠’ 40주년 기념 공연이 개막하는 날이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고양이들의 축제 ‘젤리클 볼’에 모인 고양이들은 모두 독특한 인생 경험을 갖고 있다. 20여 곡에 이르는 넘버는 각자의 독특한 삶만큼이나 다양한 곡조로 감상의 풍부함을 더해주고, 코로나19 상황에서 갈망하는 위로와 위안을 건넨다.
이번 작품을 올리면서 가장 크게 고려한 건 팬데믹 상황이었다. 지난 7월 개막을 결정했을 당시만 해도 지금보다 상황이 나았다. 전 세계 공연장이 셧다운 됐지만 ‘캣츠’의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또 다른 작품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한국에서 순조롭게 공연을 이어가자 전 세계가 K방역에 관심을 쏟았다. ‘캣츠’는 방역 신뢰를 얻은 한국이기에 성사된 공연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중순 코로나19 확산세가 거세졌고 민간 공연장에도 객석 거리두기 명령이 떨어졌다. ‘캣츠’는 개막을 앞두고 코로나19 환경에서 꼭 맞는 연출을 시도했다. 객석 거리두기를 염두에 둔 랜덤 좌석제는 물론 가장 비싼 1열을 비웠다. 무대와 객석 간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동선도 재정비했다. 젤리클 고양이들의 오프닝을 포함해 올드 듀터러노미(선지자 고양이)와 맥캐버티(악당 고양이)가 극적 효과를 위해 객석에서 등장할 때는 메이크업 마스크를 쓰고, 최소한의 동선으로 움직이도록 했다. 그리자벨라(매혹적인 고양이)가 무리에서 소외돼 쓸쓸하게 골목으로 사라지는 장면이나 거스(극장 고양이)의 회상 장면은 객석이 아닌 무대에서 이뤄졌다.
젤리클 고양이들의 우아한 몸짓과 지루할 틈 없이 조이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음악적 충족감은 신선함을 넘어 경이로웠다. 감동을 배가하는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내려놨지만 그 틈을 음악과 가무가 빼곡히 채웠다. 이 작품의 기틀을 만드는 넘버는 첫 곡인 ‘젤리클 고양이들의 젤리클 노래’다. 이어 ‘럼 텀 터거’ ‘매혹적인 고양이 그리자벨라’ ‘버스토퍼 존스’를 거치면 분위기는 극에 다다른다. 이윽고 익숙한 그리자벨라의 ‘메모리’로 1막이 마무리된다.
인터미션 중에도 무대에서 내려가지 않는 고양이가 있다. 올드 듀터러노미다. 그는 무대 위 쓰레기 더미에 앉아 관객과 일일이 눈을 맞춘다. 관객이 손을 흔들면 무대 앞쪽으로 걸어와 그루밍(고양이가 정서적 안정을 찾기 위해 하는 행동)을 하거나 ‘야옹’ 울어 댔다. 2막도 젤리클 고양이들답게 시작한다. 암전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무대에 오른다. 실제 고양이처럼 자유분방하고 새침했다. 서로 장난을 치거나 기지개를 켜며 나른하다는 듯 드러눕기도 했다. 관객이 있는 인간 세계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관찰하는 모습도 감상 포인트다.
한국 관객을 위한 특별한 선물도 준비했다. 그리자벨라와 함께 ‘메모리’를 부르는 제마이마(호기심 많은 고양이)가 갑자기 한국말로 번역한 버전을 부르기 시작했을 때 관객석은 일제히 술렁였다. 한국말 열창이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커튼콜 도중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배우도 있었다.
무대 전체가 거대한 고양이 놀이터였다. 은은한 달빛을 배경에 두고 공연장 천정과 벽면까지 이어진 조명과 무대 세트는 관객이 젤리클 고양이들의 세계를 훔쳐보는 느낌으로 인도한다. 코로나19 탓에 객석 활용에 제한이 있었지만 무대 곳곳을 활용하면서 유연한 연출을 시도했다. 고양이의 시선으로 확대된 골목의 쓰레기장으로 디자인한 무대 세트를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이 안에서 뛰노는 고양이들의 몸짓은 매혹적이었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고도로 숙련된 배우들의 섬세한 동작은 고양이의 가벼운 움직임을 그대로 형상화했다. 마치 실제 고양이처럼 자동차 보닛, 하수구 구멍, 세탁기, 신문 폐지 속 숨겨진 공간으로 느닷없이 나왔다가 이내 사라지기 일쑤다. 최고의 쇼 뮤지컬답게 발레, 아크로바틱, 재즈댄스, 탭 댄스, 커플 윈드밀 등 무대에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장르의 안무를 활용했는데 올해 버전은 본연의 감동은 유지하되 군무는 역동적으로 진화했다.
1981년 5월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캣츠’는 30개 국가 300여개 도시에서 15개 이상의 언어로 공연됐다.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과 함께 빅4 뮤지컬로 꼽히는데,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동시에 최장기 공연 기록을 세운 첫 번째 뮤지컬이다. 이번 내한공연은 2017년 호평받았던 새로워진 ‘캣츠’의 아시아 초연 프로덕션 그대로다. 당시 한국 뮤지컬 사상 최초로 누적 관객 200만명을 돌파했다.
오리지널 안무가 고(故) 질리언 린과 함께 전 세계 ‘캣츠’ 무대를 맡아온 협력 연출 크리시 카트라이트가 지난 시즌에 이어 40주년 오리지널 내한 공연도 맡는다. 그는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젤리클 세계에서 고양이들이 자유롭게 논다는 테마가 있기에 작품 고유의 매력은 그대로 가져가면서 새로운 연출을 할 수 있었다”며 “팬데믹 상황에서 필요한 희망과 위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