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서울 강서구 한 초등학교에 마련된 주민토론회에서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은 무릎을 꿇었다. 발달장애인 학교 설립을 허락해 달라는 읍소였다. 눈물의 반대편에선 반대 측 주민들이 학교 대신 국립한방병원을 지어야 한다며 고성을 질렀다. 18~27일 서울 대학로 동양예술극장에 오르는 연극 ‘생활풍경’은 언론 머리기사를 연일 장식했던 이 현장으로 관객을 이끈다. 그리곤 묻는다. “이 일이 나와는 상관없는 오래전 일일까, 혹 우리의 일상적인 풍경은 아닐까.”
‘생활풍경’은 앞서 ‘그러므로 포르노’ ‘파란나라’ ‘멋진 신세계’ ‘공주(孔主)들’ 등 문제작들을 잇달아 선보인 극단 신세계의 신작이다. 강서구 발달장애인 학교 설립 문제를 다룬 이 극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에 경종을 울린다. 김수정 신세계 대표 겸 연출가는 최근 본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차별과 혐오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이 작품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차별을 정당화하는 우리의 보통 모습”이라고 전했다.
관객의 능동적 참여를 중요시하는 신세계 작품답게 “시끌벅적한 민주주의를 경험하는” 여러 장치가 마련됐다. 가령 관객이 한강시 수리구의 한 주민으로 토론회에 참가한다는 발상의 극은 입장 전 장애인 특수학교를 지지하는 좌석과 한방병원을 지지하는 좌석 중 하나를 택해 관람하게 된다. 김 연출가는 “신세계 첫 작품인 ‘인간동물원초’부터 관객참여가 기조였다”며 “연극이 공연장 밖 일상에 조그만 파장을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좌석배치는 한국 사회에서 신화처럼 여겨지는 중립적 태도가 선(善)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신세계는 단원들이 세미나와 토론으로 장면을 다듬는 공동창작 방식으로 작품을 만든다. 주인공 김공주를 통해 위안부·기생관광·n번방 등 꼬리를 물고 이어진 성착취의 이면을 드러낸 ‘공주(孔主)들’도 배우 12명과 제작진이 위안부 피해자 증언집과 관련 취재진 자문을 바탕으로 꼼꼼하게 무대를 완성했었다.
단원들이 2년 동안 공들인 ‘생활풍경’은 2017년 사건 직후부터 논의를 시작해 지난해 대본 초안을 만들었고 여기에 자료조사 등 살을 붙여 완성본을 만들었다. 김 연출가는 “자료를 찾던 중 서울 중구와 동대문구에서도, 강원도 동해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며 “이런 문제가 되풀이되는 걸 보면서 사회적 시스템의 부재로 이야기를 확장할 실마리를 얻었다”고 말했다.
김 연출가를 중심으로 2015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신세계는 현재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극단 중 하나다. “불편함을 직시한다”는 극단 슬로건에 걸맞은 강렬한 색채의 수작들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어서다. 포르노그래피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한국 사회를 까발린 ‘그러므로 포르노’, 혈기왕성한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파시즘의 광기를 그려낸 ‘파란나라’ 등이 대표적이다.
신세계가 고전 작품이 아닌 현대극을 고집해온 이유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주변에 해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다. 특히 2014년 세월호 사건과 2018년 연극계에 들불처럼 번진 미투 사태는 단원들이 인식론적 변화를 겪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당초 안무가이자 연극배우 출신의 김 연출가가 연극 연출로 발을 넓힌 계기도 삶 곳곳에서 겪은 ‘불편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본인이 미투 운동의 당사자이기도 하다는 김 연출가는 “어릴 적부터 연극계·무용계를 포함한 모든 곳에서 한국에 뿌리 깊은 젠더 폭력과 차별 문제를 경험했다”며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걸 떠나 솔직한 고백을 위해 연극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 처음엔 벌거벗겨진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 떠올렸다.
배우 몇몇과 출발한 신세계는 현재 25명의 단원에 기술 스태프까지 총 34명이 움직이는 중형급 단체가 됐다. 외부 활동을 원하는 단원을 위해 휴단원 체제를 도입하는 등 민주적 운영을 위해 힘쓴다는 김 연출가는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극장 방역 등 안전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팀원 이동 동선을 실시간 공유하고 온라인 화상 회의와 10인 이하 부분 대면 연습을 병행 중이다.
비단 연습 만이 아니라 최근 연극계는 코로나19로 전례 없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극장이 문닫기를 거듭하면서 관객 심리도 빠르게 얼어붙고 있다. 김 연출가는 “‘생활풍경’이 담고 있는 차별의 문제가 코로나 시대 연극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속에서 ‘왜 굳이 연극을 올리느냐’ 같은 이야기들이 나와요. 하지만 연극인들을 포함해 누구든 살아 있다면 건강히 살 방법을 찾아봐야 하죠. ‘생활풍경’도 같은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