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 반기는 유럽… ‘원격근무법’ ‘연결되지 않을 권리’ 논의

입력 2020-09-07 16:30 수정 2020-09-07 19:59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 유치원에서 4일(현지시간) 교사가 아이들의 체온을 재고 있다. AP 연합뉴스

매일 아침 출근해 회사에서 일하고 퇴근길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직장인의 모습이 코로나19 이후엔 보편적이지 않을 거란 전망이 나온다. 팬데믹을 기점으로 재택 근무를 비롯한 원격 근무가 확산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변화한 업무 환경에 맞는 새로운 근로제도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6일(현지시간) 코로나19로 원격 근무가 적극 장려되면서 ‘연결되지 않을 권리’에 대한 논의도 앞당겨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프랑스는 2017년 노동개혁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세계 최초로 법제화했다. 50인 이상의 근로자가 일하는 기업은 노사가 협의해 근무시간 이후에 회사의 전화나 이메일에 응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등에서도 직원이 퇴근하거나 휴가를 떠났을 때 업무용 메일 기능이 정지되도록 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세계 많은 기업들이 원격 근무로 대대적인 전환을 시작하고, 코로나19 이전의 근무 형태로 돌아가기 힘들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유럽 국가들은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포함해 재택 근무를 할 때 근로자가 보호받을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주목받는 것은 특히 재택근무를 할 경우 업무시간의 구분이 없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에스터 린치 유럽노동조합연맹(ETUC) 부사무총장은 “코로나19 이전에는 ‘집에서도 근무할 수 있다’고 고용주를 설득하는 게 관건이었다”면서 “코로나19 이후 근로자들은 직장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기도 하지만 고용주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재택근무를 선호하는 것이 ‘뉴 노멀’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페인 정부는 원격 근무와 관련한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회사가 아닌 곳에서 근무하더라도 업무 시간이 지켜지도록 하고,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하려는 취지다. 법안 초안은 원격 근무시 ‘유연한 업무 시간에 대한 권리’를 제안하고 있다. 또 법안에는 원격 근무를 선택하는 것이 급여의 손실, 직업 안정성이나 승진 기회 박탈을 의미해서는 안된다고 명시될 전망이다. 욜란다 디아스 노동부 장관은 지난 3일 ”직원의 재택 근무로 발생하는 비용을 고용주가 지불하는 방안이 빠른 시일 내에 법제화되길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스도 ‘원격근무법’을 마련하고 있다. 법안은 원격 근무시 정상 근로 시간과 초과 근무에 대한 규정, 원격 근무에 맞는 수당 등을 담을 예정이다. 또 직원들이 일을 하는지 감시하기 위해 고용주가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원격 근무하는 근로자들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내용도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아일랜드 정부도 팬데믹이 종식된 이후에도 원격 근무를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원격 근무 지침을 논의하고 있다. 레오 바라드카 아일랜드 부총리는 “정부는 원격 근무가 ‘뉴노멀’의 일부가 되길 원한다”면서 “제대로 시행된다면 엄청난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원격 근무는 일과 삶의 균형을 개선시키고 교통 체증과 배출가스를 줄이며 기업의 비용과 통근 시간이 절약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7월 자신의 트위터에 “집안에 새로운 사무실을 꾸리는 중”이라며 책상 위에 컴퓨터 상자와 사무용품이 쌓인 모습을 게시하기도 했다.

WP는 “일과 삶의 균형을 확보하려는 유럽의 노력은 팬데믹으로 인한 재택 근무의 문제점에 대해 불평만 많고 정책적 대응은 없는 미국과 대조된다”면서 “유럽 사회는 일과 삶의 균형을 더 강조하기 때문에 유럽인들에게 원격 근무 전환이 더 쉽다. 많은 유럽인들에게 회사와의 연결을 해제하는 것은 전염병의 가장 덜 고통스러운 부분”이라고 분석했다.

WP는 또 “미국은 코로나19 피해를 입은 직원에게 월급의 3분의 2를 지급하는 긴급 의료 및 가족 휴가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지만 이는 일시적일 뿐”이라면서 “미국진보센터 분석에 따르면 민간 부문 근로자 6800만~1600만명은 이 제도에서도 제외된다”고 지적했다.

원격 근무 관련 법안만으로 새로운 업무 형태가 쉽게 정착되는 건 아니다. 특히 자녀가 있는 가정에선 교육기관의 정상화가 수반돼야 한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직장인 가브리녜 오초아(39)는 “회사는 내가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전혀 불만이 없다”면서 “나와 남편이 재택근무를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9세, 5세인 두 아들의 가정교사 역할까지 도맡아야 하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오초아는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일하는 것은 하루 종일 뭔가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아이들의 공부 계획을 짜고 지켜보면서 온라인 회의도 하고 다른 업무도 처리해고 식사 준비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팬데믹 이후 사업체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자영업자 마리아 알바레스(38)는 2세와 5세인 두 자녀를 돌보면서 대출 신청과 급여 정산 작업, 그리고 화상회의를 동시에 처리해야 했다. 남편은 구급대원이었다. 알바레스는 “그 상황을 계속 이어갈 방법이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면서 “결국 직원들에게 주4일 근무를 제안하고, 집에서 해야 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유연성을 부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인식과 인프라의 개선도 필요하다.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반드시 회사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공유 오피스 등 인프라 구축, 원격 근무하는 직원과 회사 간의 신뢰도 중요하다.

영국 BBC방송은 “많은 국가들이 ‘프레젠티즘’(정신적·신체적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도 회사에 출근하는 등 사무실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행위) 문화와 싸우고 있다”면서 “영국에서도 83%의 근로자들이 사무실에 ‘나타나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이전의 원격 근무비율은 영국이 4.7%, 미국이 3.6%에 불과한 반면 네덜란드는 14.1%로 높았다.

BBC는 “네덜란드는 꽤 오랫동안 원격 근무 전환을 이끌어 온 국가로, 핀란드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들은 많이 뒤쳐져 있다”면서 “카페와 공유 오피스뿐만 아니라 공공도서관 등이 편리한 업무 공간으로 활용되며, 네덜란드의 근로자들은 비용 절감, 생산성이라는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