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권 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체코의 이리 멘젤 감독이 오랜 투병 끝에 지난 5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82세.
이튿날 현지 언론들은 아내 올가 멘젤로바가 남편 멘젤 감독이 병마와 싸우던 끝에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1938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인은 28살이던 1966년 개봉한 장편 데뷔작 ‘가까이서 본 기차’로 1968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거머쥐면서 동구권을 상징하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체코를 배경으로 역무원의 사랑과 죽음을 그린 이 영화는 체코 영화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다. 구 소련의 체코 지배가 시작된 후에도 망명하지 않고 조국에 남아 창작 활동을 이어가며 국민 감독으로도 체코인의 사랑을 받았던 고인은 정권의 감시 등 제한적인 제작환경 때문에 연극연출과 배우로 더 많은 활동을 해오기도 했다.
멘젤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특징은 심각한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데 있었다. 희비극이라는 장르를 가장 매력적으로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고인의 영화는 늘 풍자적이고 우회적이며 풍부한 상징과 유머를 동반했다. 그런 고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1968년 체코 민주화 물결이 일던 ‘프라하의 봄’ 당시 제작한 ‘줄 위의 종달새’다. 영화는 종교적 이유로 강제노동을 하게 된 남자와 체코를 탈출하려다 붙들려온 여자를 중심으로 권력의 부조리를 특유의 유머와 서정성을 곁들여 풀어냈다.
소련의 침공과 스탈린 집권으로 빛을 보지 못하던 이 작품은 20여년 뒤인 1990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돼 이 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하는 이변을 썼다. 이밖에도 ‘거지의 오페라’ ‘나는 영국왕을 모셨다’ 등 여러 수작들을 발표하며 사회 문제를 해학적으로 풍자했다. 평소 찰리 채플린을 존경했던 고인은 본인 영화에 종종 찰리 채플린식 무성영화 요소를 가미한 시퀀스를 삽입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국과도 인연을 맺었던 고인은 2007년 제8회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자격으로 내한하기도 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