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 다리의 끝에 선 이 남자. 손을 필사적으로 흔들며 달려오는 차를 저지하고 있습니다. 불어난 강물이 빠른 속도로 흐르는 등 한눈에 보기에도 위험한 상황인데 남성은 미동도 없습니다. 지난 3일 이른 아침, 강원도 평창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날 평창은 제9호 태풍 ‘마이삭’의 여파로 피해가 속출했습니다. 특히 진부면 하진부리 시가지와 송정리를 잇는 ‘송정교’가 급격히 불어난 강물 탓에 유실됐죠. 인명피해가 없어 다행인 줄로만 여겼는데, 인근 CCTV를 살펴보니 반전이 있었습니다. 사고 직전 차량 통제에 나선 주민이 있었던 겁니다.
영상 속 시간으로 오전 7시28분25초. 한 남성이 황급히 다리 앞으로 뛰어옵니다. 다리 건너편에서는 승용차가 진입하고 있었고요. 남성은 손을 좌우로 흔들고, 차량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뒤로 물러나라는 듯한 손짓을 연신 했습니다. “다리 건너면 안 돼요. 오지 마세요. 피하세요!”라고 목이 터질 듯 외치면서요.
거센 빗줄기 때문에 남성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겠지만 진심이 통했던 모양입니다. 차량 운전자가 남성의 다급한 손짓이 의미하는 것을 눈치챘던 거죠. 다리의 절반쯤 왔던 차량은 비상등을 켠 뒤 급히 후진했습니다.
남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차량이 후진하는 중에도 계속해서 물러나라고 손짓했고, 다른 차들의 진입도 손을 가로저으며 극구 말렸습니다. 그렇게 급박했던 30초가 흘러 7시28분55초. 다리 일부가 무너졌습니다.
이 남성은 다리 근처에 사는 50대 박모씨라고 합니다. 홍준균(48) 송정4리 이장은 “7시쯤 박씨로부터 ‘큰일 났다. 다리가 이상하다. 지금 이 상태로 가면 위험할 것 같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박씨는 다리가 살짝 내려앉는 모습을 목격한 뒤 7시부터 차량 통제에 나섰고, 힘에 부치자 홍 이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겁니다.
박씨를 시작으로 홍 이장을 비롯한 인근 주민들까지 합세해 “피하세요” “오지마세요” “돌아가세요”라고 소리치며 차들의 진입을 막았습니다. 쏟아지는 빗소리와 거센 강물 소리에 여의치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았죠. 그 결과는 인명피해 ‘0’. 바쁜 출근 시간이었는데도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박씨는 이후에도 소방, 경찰 등과 함께 오전 9시까지 다리를 떠나지 않고 통제 작업을 도왔습니다. 홍 이장은 “출근 시간대였던 데다가 다리 인근에 주거지가 밀집해 있어 박씨가 다리 균열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큰일 날뻔했다”며 “박씨가 정말 많이 고생했다”고 말했습니다.
박씨의 활약은 그가 다리의 균열을 빠르게 알아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그가 모른 척 했더라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더라면 끔찍한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었겠죠. 외면하지 않았던 그의 선한 마음과 악조건 속에서도 차량 통제를 포기하지 않은 끈질김이 큰 사고를 막았습니다. 그의 곁을 지켜준 주민들의 역할도 컸고요.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박씨와 주민들처럼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친다면, 그리고 내 일처럼 남을 돕는다면 조금은 수월하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코로나19와 태풍으로 어려운 이 시기, 모두가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아직 살만한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아살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