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政敵) 알렉세이 나발니가 신경작용제 ‘노비촉’에 중독된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서방 국가들은 사건의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하면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2일(현지시간) 미국 CNN방송 등에 따르면 독일 정부는 연방군 연구소의 검사 결과 나발니가 신경작용제인 노비촉에 중독됐다는 ‘명백한 증거’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옛 소련이 군사용으로 개발한 노비촉은 짧으면 30초, 늦어도 2분 사이에 효력을 발휘하는 강력한 독성 물질이다. 2018년 초 영국에서 발생한 전직 러시아 이중간첩 세르게이 스크리팔의 독살 미수 사건에도 사용된 바 있다. 당시 스크리팔은 영국 솔즈베리의 쇼핑몰에서 딸 율리야와 함께 노비촉 중독 증세로 쓰러졌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 정부가 개입했다는 점을 기정사실화하며 규탄했다.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성명에서 “어떠한 경우에서도 화학 무기 사용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며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러시아 정부가 철저하고 투명한 방식으로 나발니 암살 시도를 조사하는 게 필수적”아러면서 “나발니 사건은 미해결로 남아서는 안 되며 책임 있는 이들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 사건은 계획된 암살”이라면서 “드러난 사실들은 오직 러시아 정부만 답할 수 있고, 러시아 정부가 답해야만 하는 아주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고 말했다.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의 위르겐 하르트 외교정책 대변인도 “이 독성물질은 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고도의 특화된 연구실에서만 나온다”면서 “러시아 정부의 도움 없이 이 독소를 제조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독일은 조사 결과를 유럽연합(EU)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뿐만아니라 화학무기 사용을 감시하는 국제기구인 유엔 산하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에 전달한다는 방침이다.
영국 정부도 사건에 대한 설명을 러시아에 요구했다. 도미닉 라브 영국 외무장관은 “이 금지된 화학무기가 (스크리팔 사건 이후) 다시 사용된 것은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세계 어디서든 금지된 화학 무기를 사용하면 결과가 뒤따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독일과 우리 동맹국, 국제적인 파트너들과 긴밀히 공조하겠다”고 강조했다.
존 울리엇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미국은 증거가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러시아에 있는 이들이 책임을 지도록 동맹, 국제사회와 협력하고 악의적 활동에 대한 자금을 제한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는 사건을 조사하는 데 독일과 협력하겠다면서도 “러시아 의료진이 검사했을 땐 그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며, 서방이 이번 일을 빌미로 러시아 제재에 나설 것”이라며 날을 세웠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이날 자국 국영TV 방송 ‘로시야1’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마치 미리 사전 연습을 한 것처럼 곧바로 마이크를 향해 달려들었다”면서 “서방이 사전에 준비된 발표를 활용해 러시아에 대한 각종 제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움직임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주독일 러시아 대사관도 “우리는 파트너들에게 이번 사건의 정치화를 자제하고 사실에만 의존할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