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여 년 전, 무덤에 묻힌 육신은 사라졌지만, 훤칠했던 왕족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던 금은 장신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손에 낀 은반지까지 오롯이 보존돼 그의 신분을 증거했다.
경북 경주 황남동 고분에서 피장자의 착장품 전체가 세트로 드러난 채 발굴됐다. 문화재청은 지난 5월 매장주체부(시신이 있는 자리)에서 금동신발과 금동 달개(瓔珞·영락) 일부가 확인됐던 황남동 120-2호 고분을 추가 발굴한 결과, 이 같은 성과를 얻었다고 3일 밝혔다. 발굴 현장은 이날 온라인 생중계를 통해 언론에 공개됐다.
피장자가 머리부터 발치까지 전신에 착장하였던 금동관 등 6세기 전반에 제작된 장신구 일체는 신비로웠다. 경주 적석목곽묘에서 피장자 착장품 일식이 출토된 것은 1973∼1975년 황남대총 발굴 이후 처음이다. 경주 적석목곽표 피장자의 장신구를 전체 그대로 노출시켜 공개하는 첫 사례이기도 하다.
피장자는 금동으로 만든 관(冠)을 머리 부분에 착장했고, 굵은고리귀걸이(太環耳飾, 태환이식)를 양쪽에 하고 있으며, 금동신발을 신고 있었다. 경주 지역 적석목곽묘에서 피장자가 신발을 착장한 사례가 확인된 것도 처음이다.
금동관은 나뭇가지모양과 사슴뿔모양 장식을 세운 형태다. 나뭇가지모양 장식의 끝 부분에도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다. 현재까지 출토된 경주 지역의 금동관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
금동관 아래에서는 금으로 제작한 굵은고리귀걸이 1쌍과 남색 구슬을 4줄로 엮어 만든 가슴걸이( 흉식)가 확인됐다.
그 아래에서는 은허리띠와 허리띠의 양 끝부분에서 4점이 묶음을 이룬 은팔찌, 은반지도 확인됐다. 은반지는 오른손에서 5점, 왼손에서는 1점이 출토됐다. 왼손 부분을 완전히 노출시키기 않았기 때문에 추가 발굴 될 경우 천마총 피장자처럼 각 손가락마다 반지를 꼈을 가능성도 있다.
금동신발은 ‘ㅜ, ㅗ’ 모양의 무늬를 번갈아가며 뚫은 앞판과 달리 뒤판은 무늬를 새기지 않은 사각의 방형판으로 마감한 형태였다. 1960년 의성 탑리 고분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금동신발이 출토된 적이 있다.
금동관의 중앙부에서 금동신발의 뒤꿈치까지의 길이가 176㎝인 것으로 보아 피장자의 키는 170㎝ 내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을 진행한 신라왕경사업단 김권일 선임연구원은 “어떤 고분에선 팔찌만, 어떤 고분에서는 신발만 나오는 게 일반적인데, 이렇게 47년 만에 전체 착장품이 한꺼번에 출토돼 흥분됐다”라며 “금동관은 금관보다 낮은 사회적 위세를 보여주지만, 금관은 지금까지 5개 정도만 출토된 만큼 이곳은 왕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