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 없이 수술할 판…” 생명 위험·경제적 부담 떠안는 환자들

입력 2020-08-31 17:59 수정 2020-09-02 19:55
대한전공의협의회가 파업 지속 결정을 내린 지난 30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본관 앞에서 전공의가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서울대병원은 내과 전공의와 전임의에 이어 교수도 집단휴진에 나서면서 내과 외래진료가 31일부터 축소된다. 최현규 기자

정부의 의료정책에 반발하는 의료계 집단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대형병원의 수술 및 진료 연기 사태가 잇따르는 등 의료 공백이 현실화되고 있다. 환자들은 생명이 달린 치료 일정이 연기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는 한편, 병원 측의 경제적 부담 전가에도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전공의·전임의 파업 사태에 가장 가슴을 졸이는 이들은 대형병원에서의 수술 및 검사 일정 연기·취소 통보를 받은 환자들이다. 전주에 사는 백모(27·여)씨는 뇌막종 수술을 받기 위해 지난 25일 전북 소재 한 대학병원에 입원할 예정이었으나 불과 이틀 전인 23일 병원 측으로부터 “수술이 불가하니 연기하거나 취소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10월 이후에나 수술이 가능한데 그조차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병원 측의 통보내용이었다. 게다가 병원 측은 수술 전 검사를 받기 위해 20만원 가까운 추가 비용을 환자가 부담하라고 했다.

백씨는 “뇌막종은 장기유착 가능성이 있어 수술이 시급하다고 들었기에 걱정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병원 측은 “암환자나 응급환자가 아니면 당장 수술이 불가하다”며 “마취 전공의가 다 파업에 동참한 탓에 마취 없이 수술을 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백씨는 “병원 측이 환자에게 한마디 사과도 없이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하라’는 식으로만 통보하는 걸 보니 환자의 생명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응급치료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서울에서 7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A씨는 지난 30일 “아이 팔꿈치가 골절돼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의료 파업으로 인해 수술이 불가능했다”며 “다른 대학병원과 종합병원 5군데에 전화를 해봤지만 전부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B씨도 “지난 28일 아이 이마가 찢어졌는데 대학병원 응급실에 의사가 없어 진료를 받을 수 없었다”며 “진료 가능한 동네 의원을 간신히 찾아 꿰멜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31일 “정부와 의사들은 환자를 볼모로 하는 충돌을 멈추고 환자 치료부터 정상화해야 한다”며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전공의들의 신속한 의료현장 복귀를 요청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하지만 의료계와 정부의 강대 강 대치가 풀리지 않으면서 의료 공백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전공의·전임의들은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에 반발하며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이어가고 있다. 서울대병원 전공의협의회에 따르면 이날 오전 11시 기준 전체 서울대병원·분당서울대병원·보라매병원 소속 전공의 953명 중 895명(93.9%), 서울대병원 전임의 281명 중 247명(87.9%)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앞서 지난 28일 고대구로병원도 전체 60명의 전임의 중 필수인력을 제외한 43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지난 28일 서울대 의대 예과 학생 235명, 본과 학생 375명 등 전체 서울대 의대생(본과 4학년 제외) 중 83%가 휴학계를 제출하는 등 정부의 정책 추진에 반대하는 전국 의대생들의 동맹 휴학도 늘고 있다.

김지애 기자 am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