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적 평점 테러에도, 굳건한 이 ‘69세’ 여성

입력 2020-09-01 06:05
영화 '69세' 포스터.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69세’ 평점은 지난 20일 개봉 직후부터 크게 출렁였다. 빠르게 평점이 하락하던 영화는 개봉 이튿날 2점대로 주저앉았다. 일부 남성들이 몰려와 낮은 점수를 매기면서다. 31일 기준 영화는 8점 중반대로 성적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작품을 비난하는 댓글이 여럿 달려있다. 대부분 “망상이다” “소설이다” 같은 근거 없는 비방들이다. 실제 영화 관객보다 평점을 매긴 네티즌이 더 많다는 점에 견줘보면 더 그렇다. 현재 9.89점인 여성 평점과 달리 남성 평점은 3.06점으로 매우 낮은 점수대에 머무르고 있다.

난데없는 ‘평점 테러’의 표적이 된 ‘69세’는 젊은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당한 69세 노년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영화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노년의 삶을 진득하게 쫓으면서 여성이자 노인이기에 겪어야 했던 사회적 편견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주연 배우 예수정의 섬세한 연기와 사려 깊은 연출로 화제를 모은 영화는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는 등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개연성이 없다”는 일부 남성들의 일방적인 비난과 달리 영화는 실제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작품이다. 노인을 향한 성범죄는 끊임없이 되풀이되온 문제였다. 경찰청 통계에서도 지난해 성폭행 피해자가 60대 이상 여성인 경우는 150여건에 달했다. 노인 성범죄 관련 기사들도 부지기수다.

임선애 감독 역시 2013년 우연히 여성 노인 대상의 범죄 관련 칼럼을 읽고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임 감독은 앞선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가 노인과 여성을 분리하고 그들을 무성적 존재로 보는 편견 때문에 가해의 타깃이 된다는 내용을 보고 ‘악하다’고 생각했다”며 “노년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인간 존엄에 관해 말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페미니즘을 선동하는 영화라고 ‘69세’를 치부하는 것이 2차 가해인 이유다.

영화가 파고들어 바꾸고자 했던 약자를 향한 2차 가해 메커니즘이 일부 네티즌에 의해 고스란히 재현된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영화 주인공 효정은 용기 내 피해를 신고하지만, 경찰과 주변인은 그를 치매 환자 취급한다. 법원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나이 차이를 근거로 들어 개연성 부족으로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여성 서사 영화가 평점 테러로 몸살을 앓는 일도 반복되고 있다. 여성이 겪는 일상적 차별을 담아내 여성 서사 열풍을 이끈 동명 소설 원작의 ‘82년생 김지영’은 지난해 10월 개봉 당시 조직적인 평점 테러를 겪었다. 주연 정유미는 개인 SNS에서도 각종 비방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할리우드 영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마블 세계관의 여성 히어로를 그린 ‘캡틴 마블’과 타이틀롤 브리 라슨도 평점 테러의 과녁이 된 바 있다.

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품게 하는 평점 테러는 관객이 능동적으로 영화를 평가해 다른 관객의 관람에도 도움이 되게 한다는 네이버 영화 시스템의 취지와도 괴리된다. 사이트를 별도로 운영하며 평론진을 구성하는 해외 영화 사이트와 달리 국내는 포털 중심이어서 의견이 마구잡이로 혼재될 가능성도 큰 게 사실이다. 영화계 안팎에서는 실제 관람객만 영화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해외 영화 사이트들에 견줘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