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거성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은 27일 “(43년 전) 우릴 발가벗겨 놓고 두들겨 팼던 그 사람들이 나와서 진실한 사과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미 퇴직했지만 청와대에 몸 담았던 김 전 수석이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면서 43년 전 경찰과의 만남이 성사될지 관심이 쏠린다.
김 전 수석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공모씨의 글을 공유하며 이같이 밝혔다. 김 전 수석은 운동 동지였던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태그했다. 공씨는 글에서 43년 전인 1977년 당시 서울 서대문경찰서 정보과에 근무하던 세 명의 경찰을 찾았다. 당시 연세대 학생이던 노 실장과 김 전 수석의 사건을 맡은 이들이었다.
1977년 10월 대학가는 암흑기였다.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이후 제대로 된 시위는 열리지 않았다. 이 물꼬를 튼 게 바로 노 실장과 김 전 수석이었다. 두 사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연세대 기독학생회(SCA)에서 함께 활동했다.
고(故) 성유보 전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이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칼럼에 따르면 학생 시위의 물꼬가 다시 터진 것은 1977년 10월이었다. 10월 13일 연세대에서 노 실장과 김 전 수석이 시위를 주도했다. 점심시간 노 실장은 연세대 대강당 3층에서 “유신헌법 철폐하라, 긴급조치 해제하라”며 유인물을 뿌렸다. 김 전 수석은 신학대 강당에서 채플이 끝나자 유인물을 뿌린 뒤 학생들과 시위를 벌였다.
12일 뒤인 10월 25일, 공씨와 연세대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에는 4000여명의 학생이 교내 백양로를 가득 메웠다. 공씨는 시위대를 이끌고 이화여대를 거쳐 신촌네거리까지 진출해 서강대생들과 함께 시위를 했다.
경찰은 이들과 이대수·오성광 등 7명을 배후로 지목해 구속했다. 노 실장과 김 전 수석도 감옥에 들어갔다. 노 실장은 징역 2년6개월에 자격정지 2년6개월의 형을, 김 전 수석은 징역 단기 1년과 장기 1년6개월, 자격정지 1년6개월의 형을 받아 옥중 동기가 됐다. 지난 2013년 대통령 긴급조치 9호가 헌법재판관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받으면서 2014년 노 실장과 김 전 수석도 뒤늦게 무죄를 선고받았다.
공씨는 당시 경찰들을 향해 “저도 어느덧 육십이 됐다. 당신들도 팔십이 다 되어 가겠다”며 “서로에게 남은 마음의 빚은 그나마 정신이 온전할 때 한 번은 정리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연락 달라”고 남겼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