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대한민국을 달군 키워드 ‘부동산’. 좁은 한국 땅에 발 디딘 모든 이들의 욕망이 얽히고설킨 부동산 문제를 파고드는 오페라가 관객을 만난다. 오페라계 젊은 콤비인 작곡가 나실인과 극작가 윤미현이 창작한 국립오페라단 신작 ‘빨간 바지’다. 1970~80년대 강남 부동산 투기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렸던 복부인(빨간 바지)과 여러 인물 군상을 통해 시대의 부조리한 자화상을 해학과 풍자로 그려낸다.
본래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최근 정부의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격상으로 무관중 공연으로 전환, 28일 오후 7시30분 네이버TV로 생중계된다. 방역 강화 직후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만난 나 작곡가와 윤 작가는 “현장 공연을 올리지 못해 눈물 날만큼 아쉽다”면서도 “부동산은 모두를 아우르는 보편적 소재다. 온라인으로라도 꼭 필요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입을 모았다.
“복부인은 권력자 남편 등을 통해 부동산 관련 고급 정보를 알게 됐던 여성들이 시초예요. 하지만 더 아늑하고, 따뜻한 곳에 살고픈 욕망은 모두가 같죠. 욕망에 투영된 인간의 이중성을 그리고 싶었어요.”(윤미현)
서울대 음대 작곡과 및 독일 뒤셀도르프 국립음대에서 수학한 나 작곡가는 서울시향 등 오케스트라와의 협업에 그치지 않고 음악극·연극·발레 등 장르를 오가며 활약했다. 그리고 2017년 오페라 ‘나비의 꿈’ 등을 선보이며 오페라 전문 작곡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 작곡가와 특유의 리얼리즘으로 대한민국연극제 대상 등 굵직한 상을 여럿 거머쥔 윤 작가는 낯선 언어·배경의 해외 오페라로는 느낄 수 없는 생생하고도 발랄한 3막 오페라를 만들어냈다.
‘빨간 바지’ 진화숙과 인생 역전을 꿈꾸는 가난한 여인 목수정 등 등장인물 6명의 애면글면한 모습이 가슴을 뻐근하게 한다. 음악만큼은 블랙코미디답게 경쾌하다. 3중창 ‘빨간 바지로 농사를 짓는’ 등 아름답고 감동적인 아리아들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3년 전 작품을 제안받았을 당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복부인 이야기에 꽂혔어요. 그런데 복부인 소재의 과거 한국 영화는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이거나 누아르처럼 폭력적이더라고요. 작가님께 아이디어를 드렸더니 시대를 꿰뚫는 이야기로 새로 그려주셨죠.”(나실인)
일찍이 도시 재개발 소재의 극을 수차례 선보였던 윤 작가는 이 시나리오에 제격이었다. 2012년부터 극작가로 활동을 시작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 ‘텍사스 고모’ 등 묵직한 작품들로 호평받은 윤 작가는 지난해 서울시오페라단 창작 시스템 ‘세종 카메라타’로 발굴된 오페라 ‘텃발킬러’에서도 가난한 구둣방 가족의 이야기로 박수받았다. 중학교 시절 ‘복부인이 되고 싶어라’라는 시도 썼었다는 그는 당시 뉴스를 연일 장식했던 빨간 바지 이야기에 살을 덧입혀나갔다.
“책과 신문기사를 엄청나게 뒤졌어요. 1970년대 새마을운동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그 시절의 라디오 가격과 투피스의 모양까지 연구했죠. 굉장히 구체적일 거예요.”(윤미현)
작품을 위촉받은 나 작곡가가 바로 윤 작가를 떠올린 이유는 작품을 함께 하며 쌓은 신뢰가 두터워서다. 지난해 라벨라오페라단의 ‘검은 리코더’로 처음 호흡 맞춘 이들은 ‘빨간 바지’에 이어 29일에는 오페라 ‘춘향 2020’을, 내년 상반기에는 연극 ‘양갈래머리와 아이엠에프’를 선보인다. 이들은 “이제 척하면 척하고 아는 사이가 됐다”며 웃었다.
“작가님 작품은 왕·영웅이 아닌 평범한 서민이 주인공이에요. 우리의 이야기를 그리는 게 우리 예술의 역할이라고 느꼈어요. 작가님이 문학도이시기도 해서 가사가 생명력 넘치고 아리아에도 잘 어울리죠.”(나실인)
다만 실내 모임을 50인 이하로 규정한 정부 지침에 따라 기존 ‘빨간 바지’ 악보와 무대 구성 등을 급하게 재조정해야 했다. 배우 6명, 합창단 12명에 40명이 오를 예정이던 코리아쿱오케스트라 연주자를 16명으로 줄였다. 대신 14대의 현악기에 전자 악기 엘렉톤을 추가해 사운드를 빈틈없이 채운다는 계획이다.
두 예술가의 강점으로 주로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기존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젊은 감각’이다. 가령 ‘춘향 2020’은 국내 최초로 시도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오페라다. 원전을 여성 서사에 맞춰 춘향 중심에서 재해석한 작품으로, 몽룡이 과거급제에 실패하는 등 취업난을 포함한 요즘 시대상이 두루 녹아있다. 나 작곡가는 “1분마다 코믹한 장면들이 등장하는 굉장히 팬시한 오페라”라며 자신했다.
나 작곡가와 윤 작가의 도전은 국내 창작 오페라의 저변을 넓히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지금, 이곳’ 대한민국의 얘기를 담은 창작 오페라들이 많아질 때 오페라와 관객의 벽을 허물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서울시오페라단 세종카메라타나 한국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아카데미 등으로 창작 오페라의 토양이 점차 발전하고 있다는 이들은 2020년을 “한국 창작 오페라의 태동기”라고 말했다.
“국립오페라단 ‘레드슈즈’를 비롯해 눈에 띄는 작품들이 하나둘 얼굴을 비추고 있어요. 예술성도 놓치지 않으면서 드라마처럼 재밌는 작품을 만드는 게 목표예요. ‘빨간 바지’도 그런 오페라 중 하나죠(웃음).”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