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들이 한자를 못 읽는다길래 40년 만에 처음으로 한글 명함을 새로 팠어요. 그렇게 2~3년이라도 더 장사해보려고 했는데….”
서울 낮 최고기온이 32도까지 치솟았던 지난 18일. 중구에 있는 방산시장에서 40년간 철물점을 운영해온 김모(67)씨는 한자로 표기된 명함을 건네며 쓴웃음을 지었다. 김씨의 가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손님들 발길이 뚝 끊겨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사람 2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3평짜리 가게 임대료는 월 150만원에 달한다.
김씨는 “건물주도 사정이 힘들다며 계약 갱신 시마다 임대료를 10% 가까이 올렸다. 갱신일도 곧 돌아오는데 억지로 운영하며 빚더미에 앉느니 이제는 정리를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김씨와 20년 동안 함께 해오던 옆집 가게 사장은 지난주에 먼저 폐업을 선언했다.
코로나19가 올해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재유행 조짐을 보이면서 동대문 인근 전통 상권에서는 폐업 이야기가 감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상인들은 업종에 관계없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입을 모아 호소했다.
여름철이면 각종 관공서와 기업 행사, 가족기념행사 등으로 주문이 쇄도하던 수건가게도 사정은 비슷했다. 16년간 같은 자리에서 가게를 운영해온 여주인 A씨(58)는 “올해 2월 중순부터 월 매출이 반토막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연매출 5억~8억은 거뜬히 뽑아내던 중소공장 거래처도 지금은 일주일 중 3일만 기계를 돌리고 있다. 재난지원금이 풀렸던 5~6월에도 경기는 여전히 살얼음판이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광장시장에서 이름만 대도 아는 50년 ‘노포(老鋪)’를 꾸려온 70대 여주인 이모씨도 이런 불경기는 난생 처음이다. 그는 텅 빈 의자들을 가리키며 “원래는 평일이라도 식탁 회전을 빨리 돌리기 위해서 술손님들에게 일부러 막걸리를 팔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다. 다른 가게보다 곱절이 되는 왕순대로 아침 투어를 나온 중국인들의 시선을 사로잡곤 했다는 이씨의 이야기는 무용담이 돼버렸다. 이씨는 “오전 장사를 나오는 게 손해라 저녁이 돼야 느지막이 문을 여는 가게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동대문시장은 한때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해외 관광객이 가장 선호하는 국내 쇼핑 명소 2위’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어두운 분위기였다. 특히 코로나19 확진자로 발칵 뒤집혔던 통일상가에는 이곳저곳에 방역 문구가 경고글처럼 적혀 있었다.
통일상가에서 30년간 의류 부자재를 팔던 B씨(64)는 “외국인 판매 비중이 매출의 70%를 담당했었다. 일본 관광객들이 한국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직접 옷을 사러 동대문에 들르곤 했는데 요즘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도매상들의 의류 판매량이 늘어나야 옷 생산량도 늘어나 부자재를 납품하는 B씨 같은 소매상들도 숨통을 틀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식에 국내 충성고객조차 방문을 꺼리는 상황이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할수록 대면 장사를 생업으로 하는 상인들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실제 동대문패션타운 관광특구협의회에 따르면 올 상반기 패션 관련 도·소매점 34곳의 매출과 유동인구는 전년 대비 평균 70%가량 감소했다. 입구에서 방문객의 발열체크를 하던 통일상가 관계자는 “이 건물에 430여개 업체가 몰려있는데 최근 매출이 급감하는 바람에 은행 대출로 연명하는 상인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글·사진=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