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목요일 저녁은 한숨을 못 잤다. 밤새 아파트 구내에서 소가 울었기 때문이다. 새벽 1시, 우연히 눈을 떳는데 아내가 일어나 있었다. 왜 안 자냐고 물었더니 이상하게 소 울음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소가 3~4초 간격으로 계속 울고 있었다. 똑같은 소리가 나서 처음에는 누가 녹음 테이프를 틀었나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던 아내는 그날 밤 하얗게 밤을 새웠다. 덕분에 나도 한 숨을 자지 못했다. 기다리는 아침은 길기만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갔는데 아, 이게 웬일인가? 황소 한마리가 나무에 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소는 나직한 목소리로 계속 울고 있었다. 누가 아파트에 소를 매놓았을까? 경비에게 소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C동을 가르켰다. 나는 주인을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인은 곧 나타나지 않았고 그 사이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간밤에 잠을 설친 사람들이었다. 어떤 집은 아이들이 깨어 우는 바람에 온 식구가 덩달아 못잤다고 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에 주인이 나타났다. 자신을 파키스탄에서 온 무슬림이라고 소개한 그는 의외로 젊잖아 보였다. 아파트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남수단, 파키스탄, 소말리아, 에리트레아, 이집트등 여러 나라 사람이 함께 살고 있어서 이슬람 모자를 쓴 그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에게 왜 아파트에 소를 끌고 왔느냐고 묻자 그는 의외로 당당했다. 금주가 이슬람 최고 명절중의 하나인 ‘이드 알 아드하’( 7.31~8.2)라는 것이었다. 이 절기때 옛날 아브라함이 이스마엘(무슬림은 아브라함이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을 바쳤다고 믿는다)을 제단에 바친 것처럼 자기들도 양을 잡고 절기를 지킨다고 했다. 이 절기때 소나 양, 염소를 잡아 1/3은 자신이 먹고 나머지는 친척과 가난한 사람과 나눈다고 했다.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이 사람의 당당한 태도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그는 그들 종교에서 분명 신앙이 좋고 헌신적인 사람임이 분명했다. 남들이 양이나 염소를 잡을 때 그는 비싼 소를 잡기 때문이다. 그는 금요일에 이맘(이슬람 성직자)를 초청하여 소를 잡기 위해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날 그의 종교적 열심때문에 감동받지 못했다. 밤새 사람들을 못 자게 한 그의 이기적인 태도가 못마땅할 뿐이었다. 차라리 그가 종교를 거론하지 않고 잘못을 사과했다면 그나마 그의 종교적 헌신을 잠시 존경할뻔 했다. 마지못해 미안하다며 급히 자리를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늘날 몸살을 않고 있는 한국교회를 떠올렸다. 왜 한국교회는 그 많은 신앙적 열정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에게 지탄받는가?
그것은 교리나 예배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열심히 믿기만 하면 우리 일을 다한 줄로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불교인이 절에 가서 하루 3000배, 5000배를 한다고 우리가 감동받지 않은 것과 같다. 불신자가 보는 것은 우리의 열심있는 기도가 아니라 기본적인 상식이며 뜨거운 헌신이 아니라 남을 향한 작은 배려다. 또한 도덕적인 완전이 아니라 잘못했을 때 양심적으로 사과하는 겸손이다. 그들은 우리가 사랑을 말하면서 광화문에서 폭언과 저주를 퍼붓거나 십자가를 말하면서 기업에서도 비판받는 세습을 강행하거나 거룩을 말하면서도 기본적인 질서나 도덕도 지키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예배나 기도는 우리의 문제일 뿐, 그것으로 불신자를 설득할 수 없다. 상식과 배려와 기본적 도덕이 없는 종교는 열심히 할수록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코로나 시대에 수원중앙교회같이 질병본부로 부터 모범적인 방역교회로 인정받는 것이 교회활동 자제를 교회탄압이라고 소리높혀 항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신자로 부터 신뢰받는 길이다. 신자가 상식을 잘 지키고 목회자가 예수를 잘 믿을 때 한국교회는 회복된다. 광화문 집회가 있던 그날 저녁 슬피 울던 소울음 소리가 어쩌면 능멸받는 이 땅의 교회들에 대한 주님의 탄식소리처럼 들려 또 한번 긴 밤을 뒤척거렸다.(이윤재 목사, 우간다 선교사)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