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청산을 비판한 원희룡 제주지사의 광복절 경축식 돌발 발언에 대해 제주지역 사회의 비판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정당은 물론 지역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과 지역 출신 국회의원, 도의회 의원들까지 나서서 원희룡 지사에 깊은 유감을 표시했다.
이석문 제주교육감은 광복절 황금연휴가 끝난 18일 기자회견을 열고 “경축식 당일 원 지사의 발언을 들으며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이 교육감은 이날 제주도의 급작스러운 요청으로 4·3을 상징하는 동백꽃 배지를 달지 않고 경축식에 참석하게 된 상황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이후 곧바로 이어진 기자들의 질문에 “그날 (현장에서)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너무 속상했다”며 “당시 심정은 그날 내가 한 이야기 속에도 들어있다”고 말을 아꼈다.
경축식에서 이 교육감은 원 지사의 발언 후 단상에 올라 “오늘 하루 만큼은 순국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새기자.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언제든 역행할 수 있다”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애국지사의 유족을 모시고 표창하고 기억하는 이 자리,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하지 말아야 할, 역사를 역행하는 말들이 나온다”고 꼬집었다.
사학과 교수 출신인 제주지역 강창일 전 국회의원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 지사에 일침을 가했다.
강 전 의원은 17일 “해괴망칙한 궤변으로 김원웅 광복회장의 경축사에 시비를 거는 자들은 스스로 토착 왜구라고 자백하는 것인가”라고 물으며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와 결탁했다.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공만 부풀려졌으니 과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제주4·3 문제 해결을 주도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오영훈 의원은 연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원 지사의 발언을 비판하고 있다.
오 의원은 17일 “친일을 옹호하는 듯한 역사관을 보여준 원 지사의 행동에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며 단체장으로서의 원 지사의 처신을 비판한 데 이어 18일에는 원 지사의 경축식 발언을 조목조목 짚었다.
오 의원은 “김원웅 광복회장 기념사의 요지는 먹고 살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던 일반 사람들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닌데 원 지사는 이들을(친일) 일반 국민들로 치환해 버렸다”며 “이는 개인적 출세만을 꿈꾸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자기합리화적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또 “원 지사가 쓴 ‘신민’이라는 표현은 군주국에서 왕이나 군주를 제외한 신하와 백성을 일컫는 말로, 이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의 자유민임을 선언한 3·1기미독립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경축식에 4·3 추모배지를 떼고 가자고 한 것이 진정으로 총무과장의 개인적 생각이었는가”라며 “광복회장의 기념사 중 ‘제주4·3항쟁, 4·19 혁명, 부마항쟁, 광주5·18항쟁, 6월 항쟁, 촛불혁명은 친일 반민족 권력에 맞선 국민의 저항이었다’는 부분이 거슬려서 본인이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런 가운데 제주도의회 박원철 의원은 18일 의원 개인 명의의 논평을 통해 원 지사의 사퇴를 강력 촉구하고 나섰다.
박 의원은 “‘참혹한 현장’이라 함은 최근 물난리를 겪었던 수해의 현장이 아니라 지난 15일 경축식에서 원희룡 지사의 돌출발언에 내팽개쳐진 꽃다발과 빈 의자의 모습을 두고 일컫는 말”이라며 “보수와 진보 모두를 아우르고 포용해야 하는 도지사가 도민 전체를 극우로 만드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했다”고 질타했다.
박 의원은 “특히 광복절 경축식의 지원을 원점에서 검토하겠다고 겁박하는 대목에서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며 “지사직을 내려놓고 정당인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이들에 앞서 더불어민주당 제주도당과 제주녹색당도 원 지사의 발언에 대해 논평을 내고 도민보다 자신의 이슈몰이를 위한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한편 원 지사는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식에서 김률근 광복회 제주도지부장이 대독한 김원웅 광복회 중앙회장의 기념사에 반발해 준비된 원고 대신 즉석 연설을 해 논란을 낳았다.
당시 김원웅 회장은 “초대 육군참모총장부터 21대까지 한 명도 예외 없이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며 “이들 민족반역자들이 국무총리 국회의장 장관 국회의원 국영기업체 사장 해외공관 대사 등 국가 요직을 맡아 한평생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전 세계에서 민족을 외면한 세력이 보수라고 자처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고 했다.
또, 최근 작고한 백선엽 장군을 지칭한 듯 “서울현충원 가장 명당자리에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자가 묻혀 있다”며 “(그는)해방후 미국에 다시 빌붙어 육군참모총장과 장관을 지낸 자”라고 했다.
이에 원 지사는 “태어나보니 일본 식민지였고 식민지의 신민으로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없는 인생경로를 살았던 많은 사람이 있다”며 “비록 모두가 독립운동에 나서지 못했지만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갔던 게 죄는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편저편 나누어서 하나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단죄되어야 하는 그런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조각내기 하는 시각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며 “앞으로 이런 식의 기념사를 또 보낸다면 광복절 경축식의 모든 행정 집행을 원점에서 검토하겠다”고 경고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